Home >

늦은 소식

2005.07.03 18:50

김솔 조회 수:244 추천:1

1. 장성에서 그들을 만난 뒤로, 누군가의 꿈에 불과한 나에 대해 다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2. 장마보다 먼저 도착한 자는 툇마루에 앉자마자 아름다운 빗소리부터 기대했습니다.
3. 시공간은 한 덩어리여서 시간축을 늘리면 공간축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지나치게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4. 지난 밤 꿈의 파본들을 치우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늦게까지 이야기하던 자리 위로 감나무 가지들이 푸른 귀를 퍼덕이며 웃자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5. 한 시인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제비는 빈집이나 혼자 사는 집의 처마에다가는 집을 만들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매년 봄이면 빈 방에 텔레비전을 틀어두고 제비를 유혹하고 있다는군요.
6. 귀국 선물로 <에프터 선텐 크림>을 받았습니다. 그걸 마시면 어떨까요? 마음 위에 바르고 싶습니다.
7. 법성포의 붉은 갯벌과 해무가 제게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8. 여전히 저는 길을 찾는 데 서툽니다.
9. 위봉사라는 절에 들러 큰스님의 맑은 이야기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우리에 갇혀 있던 개는 낯선 자들에게, 혹은 견성하지 못한 자들에게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하지만 짖는 개는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그 개만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10. 요즘 출가하는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나이가 많고 학벌도 높답니다. 예전보다 깨달음이 늦은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얘기지요.
11.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이모의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붉은 흙은 슬픔과 함께 산딸기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12. 충장로를 혼자 걷다가 문득, 기념품을 사고 싶어졌습니다.
13.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친구의 말을 듣지 않을 걸 후회합니다. 그 친구가 추천해 준 회사의 주식이 반년 사이에 서너 배가 올랐기 때문입니다.
14. 수염과 머리를 깎긴 했지만 힐끗거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여전히 발견됩니다.
15.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습니다. 왜냐면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왔으나 너무 낯설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친척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누나의 신용카드를 사용했습니다.
17. 여행 내내 나를 괴롭히던 책들을 다시 마주하고도 쉽게 손길을 건넬 수 없었습니다.
18. 이주 동안 열 두 권의 책을 샀습니다. <고통스러운 시집>을 추천해 달라고 어떤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돈키호테>부터 읽을 작정입니다.
19. 허기는 왜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는 걸까요?
20. 책을 읽을 좋은 장소를 추천해 주십시오.
21. 술자리마다 예술가적 삶이 그의 작품보다 더 중요하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어느 숙소에서 훔친 책 때문입니다.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근원수필, 김용준 지음, 범우사)  누군가는 제 게으름을 빈정대기도 했습니다.
22. 요즈음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있는 까닭은 제 몸 속에 쌓인 길들이 빠져나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길 결핍 증후군. 길이 빠져 나간 자리에 글을 채워 넣는 사람도 있겠지요.
23. 불투명한 우산을 쓰고 광화문 근처의 건널목에 서서 붉은 눈을 주시하고 있다가 바닥에 떨어져 짓뭉개진 새의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이곳에서 첫 장마를 보내다가 갑작스럽게 차오른 구름 때문에 허공을 찾을 수 없어서 추락한 어린 것일 겁니다.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차들에도 붉은 화인이 선명하게 찍힙니다.
24. 여자들의 뒤꿈치가 불쌍합니다.
25.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여행 중에 들었던 노래 하나를 여전히 듣고 있습니다. “내 안엔 날 죽이려는 욕심이 살아/또 내 속엔 날 망치려는 질투가 많아/내 미소를 나의 마음을/회색빛으로 점점 물들이고 있어/사막 하늘 끝에 왔어/날 버리러 왔어/내 욕심 내 질투 모두 다/잠든 내 속의 바다로/날 찾으러 왔어/내 웃음 내 온기 내 모습을/내 미소를 나의 마음을” (사막하늘 끝에서, 박혜경)
26. 에쿠아도르에서 사가지고 온 원두커피가 고스란히 글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27. 제가 분실한 것들을 안타까워 해주는 사람들에게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그것들은 세관 검사원들이 모두 숙지하고 있는 <반입 금지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28. 제가 보낸 전서구 중 한 마리만이 정확한 주소로 날아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9. 저는 습관과 이별에 약합니다. (번역자의 각주에는 ‘습관적 이별’로 번역되기도 한다.)
30. 내 안에 흉터처럼 남아 있는 빈 우물 하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다시 지루한 여행을 떠날 작정입니다.
31. 제가 불임의 고독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제발 죽비를 들고 저를 후려갈겨 주십시오. 아니면 술자리 약속을 해주시던가.

2005.7.3 김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58 서늘한 가을물 [1] 2003.09.19 260
1957 윤성택 시인께 [2] 김언 2004.03.08 258
1956 안녕하세요? [1] 김미옥 2011.06.02 257
1955 덕분입니다 [4] file 천서봉 2005.10.18 256
1954 10월의 마지막 밤 윤성택 2002.10.31 256
1953 잠바, [1] 윤성택 2003.11.14 255
1952 비밀의 화원 [2] 조은영 2004.06.09 253
1951 <b>『문학사상』 당선소식</b> [5] 윤성택 2001.11.10 252
1950 저녁 [4] 윤성택 2003.02.04 251
1949 가끔씩... [2] 김유정 2004.05.19 249
1948 혼자 보는 영화, [4] 윤성택 2003.05.21 247
1947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2] 이정희 2011.01.22 245
1946 봄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4] 윤성택 2003.03.16 245
» 늦은 소식 [1] 김솔 2005.07.03 244
1944 고립 [3] file 천서봉 2004.12.15 242
1943 [re] <b>감사합니다</b> [6] 윤성택 2006.09.23 240
1942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5] 2003.07.10 240
1941 시골 기찻길 [3] 전수빈 2004.01.22 239
1940 기별 [1] 윤성택 2003.01.13 239
1939 보류 [2] 이파리 2004.08.25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