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파란빛으로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어 땅으로 머리를 처박다가 문득 눈에 잡힌 구두에 초점
이 클로즈업 된다.
구두...... 먼지가 내려 앉은 구두는 걸어온 시간만큼 접
힌 코주름이 하얗게 드러나있고, 긴장감이 사라진 후 불어
난 아줌마의 몸마냥 날렵치 못한 매무새다.
걸어온 시간만큼 따라가 보니 처음 구두를 신었던 날은 마
치 딴 세상같다.
구두는 몹시도 날렵하게 나의 발을 옥죄이고 있다. 나는 신
데렐라의 구두를 훔쳐신은 못된 새언니같다.
'다른 사람같아....'
그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같다는 건 오늘 내
모습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의 말은 마법처럼 잠시 아픔을 잊게한다. 나는 얌전한 꾸
냥처럼 그의 팔짱을 끼고 걷는다.
인어공주가 지느러미 대신 발을 가졌을때 처음으로 땅에 발
을 내디디면서 아파했던 동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도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삼류소설이나 낙서시의 한 구절을 끄적거리는 사람처럼 나
는 별것도 아닌 사실에 행복해진다.
벤치에 앉은 그는 구두를 바라본다.
'여자들은 참 신기하지. 어떻게 그런 작은 발로 걸을 수 있
지?. ..나도 한 번 신어보고 싶어'
그가 돌연 몸을 굽혀 손으로 구두를 쓸어보는데 남방 앞주
머니에선 담배와 펜이 쏟아진다. 그 펜...... 내가 사주었
던....그 펜이 그의 앞가슴에 들어있었구나 생각하니 흐뭇
해진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에 잠
시 손이 들려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가 없는 시간과 그가 있던 시간
은 구두라는 매개물을 통해 신기하게 이어져있다.
그 시간의 접지를 들춰보니 요술지갑에서 동전을 찾은 어린
애마냥 모든 것이 이상하기만 하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주면 좋겠다. 내일이 있어 행복한 시간
은 그 사람을 잃어버림으로써 끝나버렸다.
내 삶은 하향선을 그리고 있다. 처음부터 '오름'이란 내 삶
에 없었던 게 아닐까? 난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던거
다. ..제길!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좋겠다. 다시 올라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