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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에게 [모텔 카프카 - 김솔, 고전읽기]

2001.05.28 12:27

윤성택 조회 수:130 추천:2






김솔에게,


오늘 탁 트인 하늘을 보니까,
그곳 어딘가에 마음을 주차하고 싶어지더군.
인연도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걸까?
요 몇 번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내가 항상 일이 있어,
만나지 못해 미안하더구나.
그래도 솔이와의 추억이 묻어나는
회기 전철역 포장마차는 잊지 않았단다.
전철이 지나고 기차가 지나고
탁자가 가늘게 흔들릴 때마다
난로의 톱밥처럼 마음 안으로 뿌려지는 소주,
그때 은어처럼 오가던 농담도
치열함의 다른 이름였음을 이해한다.
문화적인 코드는 모두 탐독하고야마는
너의 갈증은
아마도 너가 애닯게 부르다 죽을 이름에 대한
불안함이 반영된 것은 아닌지,
너를 좀더 낮은 곳에 내려놓고
세상이 짓밟고 지나가길 바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구나.
연전에 술에 취해 아무데서나 자고 있더라란,
얘길 들었어. 어쩌면 너는 술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무너지지는 않는지 내심 걱정이다.
너의 꼿꼿이 세운 머리칼처럼
나는 너가 세상에, 문학에 좀더 만만해지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소주병들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우리 앞에 놓여질 많은 날들이 있음을
아직도 탕진해야할 많은 치열함이 있음을
믿고 싶구나.
조만간 도둑고양이처럼 상경하길 바라며,
너의 말처럼 몸 또한 늘 자중자애하길.
하늘 조뚜 푸른 날,
솔이에게.







모텔 카프카



글 : 김솔


(실제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터미널 부근에서 그런 이름의 모텔을 보고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카프카라는 유명한 소설가의 저서 목록에 <성>이란 작품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 모텔의 주인은 그런 간판을 모텔 입구에 세움으로써 자신의 현학을 자랑함과 동시에 연인들의 성욕을 발동시키고 행인들의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가 그 미로 같은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걸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초대장을 지니고도 끝내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두세 시간 쉬어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길 바라는 주인의 욕망을 그 공허한 이름은 오래 전부터- 어쩌면 체코에 첫 유태인이 이주해 오기도 전에- 포용할 수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다. 정작 그게 아니라면, 그가 서음(書淫)을 즐길 줄 아는 낭만적인 변태여서 카프카 작품에 장치되어 있는 미로를 동경했을 수도 있겠다. 모텔엔 응당 임검 나온 경찰들을 빠뜨릴 미로가 필요하니까. 이 글은 움베르토 에코가 발명해낸 '21세기 표절에 걸리지 않고 글쓰는 법'에 충실히 따른다. 어차피 전지자 보르헤스가 갈파한 것처럼 "모든 글은 글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고 이 글은 우연적인 것이며 독자가 읽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이 글을 읽기 전에 카프카의 <법 앞에서>라는 단편을 읽어 둘 것.)

모텔 카프카의 계단 아래로 지친 남녀가 걸어 내려온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인간의 조상은 고기를 먹기 위해 땅으로 내려와 걷게 되었다고 마빈 해리스는 <작은 인간>에서 말한다.) 그들은 침대 위에서 전혀 쉬지 못했다. (요제프 K는 침대에 누워서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이제 그것은 현대적 삶이 이끌리는 일종의 경향이다.) 분명 그들은 서로의 육체를 간절히 원했고 ("언어적 사유와 언어적 권력에 대해 투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육체의 언어"라 앙또냉 아르또가 썼다고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나이도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이런 근사한 문장이 나온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우리의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서둘렀으나 (앙리 미쇼는 "인간은 느린 존재지만, 그것은 단지 경이로운 속도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적었다.) 곧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만다. (뭉크보다도 비명 소리를 더 잘 그리는 작가는 아마 늙고 병든 고야와 파렴치한 프란시스 베이컨일 것이다.) 그들을 놀라게 했던 건 벌레로 변해있는 그들의 몸뚱이가 아니다. (파브르가 말년에 <식물기>를 썼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순 있다. 식물은 곤충과 성교하면서 번식하므로.) 정작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꺼내놓을 수 없었고 (화려한 여성 편력을 지닌 피카소의 논리는 명쾌하다. "나이가 들면 담배를 끊게 되지만 담배에 대한 욕망은 남는다. 사랑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그것을 할 수 없지만 욕망은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 짝지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의 약혼과 파혼 끝에 펠리체 바우어를 완전히 떠나 보내고 카프카는 일기에 썼다. "F가 떠남. 나는 울었다. 모든 것이 힘들고 거짓이지만 제대로 된 일이다.") 결국 그들은 상대의 목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어주는 것으로서 배설을 해결해야 했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이브의 임신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신체기관은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여 욕정에 의한 흥분을 하지 않고도 부모가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달성시킬 수 있다." 그의 고민을 이해할 것.) 생각보다 절망은 그리 불투명하지는 않아서 ("절망할 때 희망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파스테르나크의 닳은 명제보단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순하고 치열한 정열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던 <젊은날의 초상>의 화자의 치기 어린 선언이 젊은 영혼을 열광시킨다.) 그들은 화해할 수 있었고 (카프카는 일기에 썼다. "나는 의식불명에 이르기까지 내 자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시킬 것이다. 모든 사람과 불화하리라.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프라하의 허공 속에다 작은 원을 그렸다.) 방을 나올 땐 가벼워져 있었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르면 자유낙하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속의 사람들은 무중력과 같은 가벼움을 경험한다고 한다. 물론, 중력장 속에서는 가벼운 너와 무거운 내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평등의 정신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불투명한 현관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문지기의 제지를 받는다. (최근에 읽은 박상륭의 <두 집 사이>라는 소설은 아주 유용하다. "<들어가다>는 그런데, <나가다>와 뫼비우스의 띠나 유로보로스("제 꼬리를 삼키는 뱀"-이윤기)와 같다는 데에, 늙은네의 화미 맺기의 실패가 온 것이다.") 완강하게 버티며 문지기가 말하길 자신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명령은 없었다. 그저 배고픈 강장동물의 촉수 같은 미필적 고의만이 득실거렸을 뿐이다. 그것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광주가 단말마 속에서 통째로 쓰러졌다. 명령할 수 없는 불쌍한 장군들. "권력은 건강에 해롭다."라는 대사가 고다르의 영화 속에 있었던가.) 그래도 끊기 있게 기다리면 언젠가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대답을 들을 순 있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작품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런 작품들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흔히, 질문은 이미 대답이 다 주어진 뒤에 너무나도 오랜 뒤에 제기되니까요." 앙드레 지드는 오스카 와일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조급해졌고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요. 종말이란 어디서나 똑같은 법인데, 이곳에선 그걸 재촉까지 하고 있소." 오시프 만델스탐이라고 하는데 정작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당신이 만약 "난 지금 이상한 나라 엘리스의 토끼를 뒤쫓고 있는 중이라오."라고 말했더라도 역시 그걸 충실히 인용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을러보거나 회유해 보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큰게 자리에 '사람들의 문'이 놓이고 염소자리에는 '신들의 문'이 있어 힌두교도들의 영혼이 드나들며 현세에 나타나고 사라진다. 크리스천에게는 예수가 곧 문이다. ("나는 문이다." 요한 복음서, 7:9) )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문지기와의 친분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상부와의 고리를 찾는다. (진화론자들이 인간과 유인원의 공통 조상이 될 수 있는 고대의 생물종을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고 부른다.) 덕분에 그들은 문지기 이외에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친절한 설명조차 들을 수 없었고 간절함이 수그러들기도 전에 늙고 쇠잔해져 갔다. (엘리엇의 <황무지> 머리말에 "쿠바의 땅에서 나는 독 안에 든 시뷜레를 분명히 보았다. 아이들이 시뷜레에게,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뷜레는 '죽고 싶다'고 대답했다." 라는 문장이 박혀있다. 시뷜레는 아폴론의 자비로 모래알만큼의 세월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청춘으로 살게 해달라고 빌지 않아 늙은 채로 아직까지 살아있는 무녀의 이름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지기가 그들을 돌보기는 했지만 동정심과 임무를 혼동하여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동정이란 그러나 괄시보다 나쁜 게 아닐까. 동정이란 자기의 행복을 확인하고 즐기기 위해 자기보다 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 같은 게 아닐까." - 김성동, <만다라> - 하지만 동정과 사랑은 너무 쉽게 몸을 섞는다.) 인내심 많은 시간은 갇혀 있는 그들이라고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더 깊은 생채기를 새기며 고로쇠나무의 수액처럼 생명의 징후를 덜어내었고 체념한 문지기도 교대준비를 끝냈다. ("기억하라, 시간은 욕심쟁이 노름꾼/ 속임수 쓰지 않고도 매번 이긴다! 그건 철칙이다/ 낮은 줄어들고 밤은 늘어난다. 기억하라!/ 심연은 항상 목이 마르고, 물시계엔 물이 없다." 보들레르 <시계> 일부.) 유언을 하기 위해 숨겨둔 힘까지 끌어올려 그들이 (쇼펜하우어의 유언은 "벨리사르에게 은화 한 닢을 주어라."가 전부였다. 하긴 멜론이 먹고 싶다며 죽은 천재 이상보다는 더 평온하였을 것이다.) 죽음이 도달한 다음에는 저 문을 나갈 수 있느냐고 묻자 친절한 문지기는 눈가에 나이테를 모으며 잠시 웃더니 청동문 같은 입을 천천히 뗀다. (<분장실에서의 찰리 채플린>이 유진 스미스의 사진 속에서 거울을 보고 있다. 그는 정말 희극배우였을까. "왜냐하면 비극에는 모든 종류의 쾌락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비극에 적절한 쾌락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채플린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여기가 바로 당신이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했던 곳인데 도대체 왜 죽어서까지 나가려고만 하는 거요? 결혼을 하고 보금자리를 꾸미고 아이를 기르게 되면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 대신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아내도록 명령받았거늘. 그 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그걸 알려주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엄정함이야말로 문지기가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소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이제 내가 저 문을 나갈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여기에서, 예컨대 키에르케고르가 표현한 것과 같은 존재의 사유에 관한 역설이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 세속적인 희망에 노크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통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이해하기 위해 <심판>을 써야만 했다."고"라고 알베르 까뮈는 <프란츠 카프카의 저작에 담긴 희망과 부조리>라는 글에서 말한다.) 문이 열리자 그 속으로 거울 하나가 보인다.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썼다. 또 그는 "나는 그 반짝거리는 표면이 무한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증시켜 준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을 자신의 글 속에 숨겨 두었다. 분명 그는 스스로 맹인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