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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제작(문학사상 2월호, 윤여탁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317쪽)





오세영의 《적멸의 불빛》
오규원의 〈편지지와 편지봉투〉
채호기의 〈바다〉
김춘수의 〈페르소나〉
허만하의 〈아름다운 것은 가늘게 떤다〉
유경환의 〈오대산〉
고재종의 〈시린 生〉
윤성택의 〈산동네의 밤〉

(……중략)

시 쓰기란 다름아닌 세상읽기

  이렇게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서 세상을 읽어내고 자신을 읽어내는 것처럼, 독자도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과 세상을 읽어내고 자신을 읽어낸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힌 바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이해이며, 이같은 이해의 과정과 결과를 시인 자신의 언어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이런 세상읽기로서의 시 쓰기는 지난해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한 윤성택의 시 (〈산동네의 밤〉《현대시학》,1월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 〈산동네의 밤〉


  이 시는 산동네 풍정(風情)을 섬세하고 진솔하게 묘사, 표현하고 있다. 갓 등단한 신인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만치 않은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를 읽노라면, 잡다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동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좁은 산동네의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바람을 차고 오르내리는 걷지 않은 빨래, 이정표 구실을 하는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등이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산동네의 모습이다.
  이제 시인은 이 산동네에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았고, 그들과 "허물없이" 살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몇 촉 안 되는 전구를 켜는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그렇기에 보일러 연기를 따라온 하늘의 별이 내려와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를 비추고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독자인 나도 시인처럼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안도현의 석 줄짜리 짧은 시를 떠올리면서…….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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