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김완하 추천시(시인/ 한남대학교 문창과 교수/ [시와정신] 편집인 겸 주간)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윤성택(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 시인은 매우 감성적인 시를 쓰는 신예시인입니다. 이 시는 차를 운전하면서 겪은 일상의 일을 통해서 우리 생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윤성택의 시 쓰기는 생에 대한 끝없는 성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초행길을 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오일램프에 불이 들어온다면 우리는 오직 주유소를 향해서 가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른 행선지를 향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기에 윤시인은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차를 몰고 주유소에서 주유소까지만 다녔던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해 보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한 중심 내용은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때로 예상치 않게 우회할 수밖에 없는데, 실은 그 우회로에서 우리 삶의 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주유소에 가는 사소한 일에도 조금은 더 설레임을 가지고 갈 일이겠지요.

* <미즈엔> 2003년 11월호 수록

출처 : 김완하 시인 홈페이지 http://www.kimwanha.com/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66 담백한 형사(形似)와 시적 상상력의 아득함 - 엄창섭 교수 2019.11.04 1095
65 현대적 동양미학으로서의 시 - 이병철 시인 2015.06.24 3064
64 시간여행자, 아틀란티스에 기류寄留하다 - 최형심 시인 2015.05.11 3357
63 윤성택씨 첫 시집 출간 - 조선일보 file 2006.11.06 3609
62 [새책] 리트머스 - 한국일보 2006.11.04 3684
61 [책꽂이] 리트머스 - 국민일보 2006.11.04 3817
60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 시선집 평 中 (김백겸 시인) 2004.08.29 3826
59 리트머스 - 이정희 (회원) 2006.11.17 3842
58 탈수 오 분간 - 홍예영 시인 단평 2005.07.01 3886
57 검은 비닐 가방 - 김화순 시인 2006.11.04 3889
56 무위기 - 이종암 시인 단평 [1] 2004.10.11 3895
55 고독한 자들의 합창 (2004년 『시천』 네 번째 동인지 해설中/ 강경희 평론가) 2004.10.04 3947
54 극사실주의의 감각적 표현 - 강인한 시인 《현대시》 2007.01.05 3950
53 FM 99.9 - 정승렬 시인 단평 2004.11.21 3982
52 [금주의 신간]감感에 관한 사담들 - pandora.tv(2013.07.12) 2013.08.22 3984
51 삶을 비추는 풍경들 - 오창렬 시인 《문예연구》 2007.01.05 3996
50 장안상가 - 김홍진 평론가 계간시평 2004.11.21 4020
49 시집 리뷰 - 남기혁 평론가 《문학동네》 2007.03.02 4021
48 <신간> 윤성택 시집 - 연합뉴스 2006.11.04 4047
47 시집 리뷰 - 박송이 평론가 《시와정신》 2007.03.20 4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