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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 홍은택 시인 시평

2005.07.13 14:08

윤성택 조회 수:5196 추천:96


《시현실》 계간시평 2005 여름호

<아날로그, 디지털, 그리고 하이브리드 상상력> 부분 中

홍은택

(.....중략.....)

아날로그 상상력은 비교적 익숙한 전통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이것이 다른 두 가지에 비해 반드시 쉽다거나 뒤떨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자들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참신하고 놀라운 시상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더 어려운 과정을 겪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자칫 진부해지기 쉬우므로 더욱 발칙한(?) 상상력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폐선에 걸터앉은 노인은 닻처럼 휘었다
        필생 무게중심이 되어왔다는 듯
        웅크린 등은 갈고리처럼 앙상하다
        적막이라는 그물을 투망질 하는 건
        담벼락에 걸쳐진 담쟁이들 뿐,
        횟집 수족관에는 먼지들이 몰려다닌다
        물살이 간척지에 반쯤 묻힌 폐선을 흔들고
        내력을 둘러싼 갈대들이 삐걱거린다 추억은
        칠 벗겨진 호(號)와 같아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세월 가장 아득한 곳에서부터
        꿈은 몰려오는 것이라고, 목울대가 울렁인다
        번들거리는 오후의 졸음이 스며온다
        더 이상 머물지 않아도 좋다는 듯

        폐선이 수면에 겹겹 나이테를 풀어낸다
        물새의 날개 짓에 햇살이 튀고
        빛을 낚은 갈대들은 한 방향으로 구부러진다
        멀리 굴뚝연기에도 느껴지는 엔진소리
        기어이 시동이 걸린다, 점점 속력을 내면
        붉은 녹이 꽃잎처럼 떨어져 나가고
        입을 벌린 월척들이 꼬리로 솟구쳐 오른다
        저 펄떡거리는 물결들! 눈을 비비는 동안
        저녁놀은 밤의 기억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꿈도 정박할 곳에 다다른 것인지 노인은
        제 몸의 닻을 지고 방죽을 홀로 걷는다
        집으로 향한 발자국이 밧줄처럼 딸려 나온다
        언젠가 줄이 끊기면 이 길도 놓아주리라  
        노인은 휜 등을 힘겹게 의자에 걸어놓는다


        (윤성택, 「닻」『현대문학』 2005 3월호)

   윤성택의 「닻」은 시종일관 전통적인 상상력과 은유의 표현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과 폐선의 상사관계를 중심으로 밀고 가는 생에 대한 통찰력의 근기가 만만치 않다. 노인의 <웅크린 등>을 폐선의 휜 <닻>과 겹쳐 놓고 양자의 공유물인 <적막>과 <내력>에 대해 차분히 묘사한다. 덜컹거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기어이 시동이 걸>리지만 <점점 속력을 내면/ 붉은 녹이 꽃잎처럼 떨어져 나>가는 폐선과 노인의 평생을 함께 한 삶의 궤적! 이제 그들의 <꿈도 정박할 곳에 다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줄이 끊기면 이 길도 놓아주리라>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몸의 닻을 지고 방죽을 홀로 걷는> 노인의 뒷모습이 아득하다.

   이미 지적한 것 외에도 빛나는 은유의 바늘들이 시행들 곳곳에 숨어 있다. <폐선이 수면에 겹겹 나이테를 풀어낸다>에서 폐선과 노인의 삶의 내력이 겹쳐지고, <빛을 낚은 갈대들은 한 방향으로 구부러진다>에서는 낚시 바늘, 폐선의 닻, 노인의 굽은 등이 한 방향으로 구부러지는 갈대와 겹쳐지며 한 곳만 바라보며 살아온 이들 삶의 지향점을 가리킨다. 이렇듯 이 시의 미덕은 자칫 진부하게 풀어지기 쉬운 소재를 단단한 서정으로 묶어주는 은유의 힘이다.




■홍은택: 시인/1999년『시안』으로 등단/대진대학교 영문과 교수/저서『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의 시세계』/역서『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paters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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