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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 가방 - 김화순 시인

2006.11.04 10:42

관리자 조회 수:3889 추천:86

《앎과삶》16호 中 <현대시 산책>  



                사내는 느릿느릿 광장을 가로지른다
                발을 옮길 때마다 두 갈래로 비켜가는 행인들,
                벌어진 틈은 뒤편에서 엇물린다
                시계탑이 그림자를 바짝 당겨와 보도블록을 채워올 때  
                사내가 앙다문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길을 질질 끌고 오는 동안 슬픔 따위는
                맞물려놓은 단단한 가방처럼 닫아버렸다
                메슥거려 치미는 핏물을 뱉으며
                사내는 형형해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늘의 지퍼를 열면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길이 있으리라
                튀어나온 광대뼈는 오후를 반사한다
                사내는 광장을 고스란히 기억하려는 듯
                디지털카메라로 찡그린, 웃긴, 입 벌린, 풍경을 저장한다
                이렇게 이별은 한낮의 그림파일이다
                대합실로 향할 때 주머니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우두커니 고개를 묻고 액정을 보다가
                휴대폰을 그대로 휴지통에 놓아버린다
                대합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마지막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야전잠바의 깃을 세워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인다 얇은 미소가
                사람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이 희미해져간다
                사내는 눈을 감는다
                막차가 떠났는데도 꼼짝하지 않는다
                지퍼 속으로 머리가 미끄러져간다

                - 윤성택 <검은 비닐 가방>


누구는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시인은 언어의 의미를 극대화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은 작은 사물, 꿈, 사랑, 죽음, 이별, 시간, 삶 등과 같은 어어 이전의 문제에 대해 깊이 천작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다.

일찍이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을 둘로 나누어 생각했다. 사계절의 흐름이나 낮과 밤의 흐름, 동식물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연적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했으며 비록 흘러가는 시간일지라도 특저한 시간, 즉 어떤 일이 수행되는 특별한 시간은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인들은 위의 두 가지 시간 중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다. 삶의 항아리에 가득 담긴 출렁이는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들을 포착해서 <나>와 관련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시 만든다.

시간의 유장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시선으로 만난 특별한 마디들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시인이 눈여겨 탐색하고 깊이 있게 천작하는 그 작은 틈들이 시의 소재가 된다.

위의 시는 짧은 단편영화를 보는 듯 하다.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삶을 사는 한 사내가 <느릿느릿 광장을 가로지르>는 시점부터 이 느리고 음울한 영화는 시작된다.

역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비닐 가방을 든 남자의 행적이 서서히 카메라에 잡힌다. 사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두 갈래로 벌어졌던 행인들은 <뒷편에서> 가방의 지퍼처럼 <엇물린다>

이 시에서 지퍼처럼 채워지는 것들은 여기저기 많다. <시계탑이 그림자를 바짝 당겨와 보도블록을> 채우고, 지나가는 행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다시 채운다. 검은 가방의 지퍼처럼 슬픔 따위는 달칵 채워버린다.

지금 이 사내가 찾아가는 곳은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 사내는 광장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하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에 촤르르 풍경을 저장하고 세상과 소통하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휴대폰도 휴지통에 버린다.

사내는 <마지막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야전잠바의 깃을 세워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인다.> <지퍼 속으로 머리가 미끄러>지고 사내는 드디어 그 자신이 역 광장 의자 위에 놓인 검은 비닐 가방이 된다.

날이 갈수록 노숙자들이 늘고 있다. 세상의 그늘을 이고 있던 탄탄한 어깨들이 세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힘없이 기울고 있다. 결국은 <그늘의 지퍼를 열고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소멸되지 않는 것은 없겠지만 가끔은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줄도 알아야겠다. 언젠가 날아가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포롱포롱 새도 키우고 사랑도 키우는 삶은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가?

- 김화순 시인, 2004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바닥을 쳤다" (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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