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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혀진 책 - 김솔(소설가)

2006.11.06 13:27

관리자 조회 수:5181 추천:100

<읽혀진 책>


-상상은 잃어버린 기억이다. (김솔)

결국 세상은 단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라르메

1. 간이역불빛이라고 불리는
그는 처음 <간이역불빛>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나중엔 <사진관빈의자>로의 변신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는데 다행히 새로운 직장에선 필명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의 <간이역불빛>의 찬란한 소멸을 끝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다시 본래의 이름 석 자로 돌아온 그이지만 지금도 <간이역불빛>이라고 불릴 때마다 술잔을 비우고 먼 풍경으로 눈동자를 채우곤 한다. 그때 우리는 그를 간단히 <불빛님>이라고 불렀다. 그의 주위엔 <달의이면>이나 <오르페> <오픈스카이> <허밍버드>와 같은 사내들과 <보코논>이나 <프라니> <수에> <워너비>라고 불리는 여자들도 살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 이름들 속에 숨긴 자신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가 기차와 떠남 또는 떠돎과 불빛과 쓸쓸함을 가까이 하고 있으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기차:

“차단기가 움직이고 성급한 기차는 관음증의 터널로 질주한다 담쟁이는 우르르 방음벽을 더듬는다 수선집 처마를 박음질하는 빗소리,” <구두로 말하길>

“기차는 필름처럼 레일을 지난다/ 어떤 환등의 불빛이 그 안에 들어 있는지/ 차창으로 이어진 장면 장면이/ 풀려지는 릴만 같아서/ 결말을 알 수 없는 예고편처럼/ 종착역이 궁금해진다” <언제나 영화처럼>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여정이었다” <밤기차>


떠남 또는 떠돎:

“밤에 떠난 사람도 많았으나 건물 우편함에/ 배달된 청구서는 그 여행을 뒤따라가지 못했다” <장안상가>

“젖은 손 맞잡고 문득 펴 보았을 때/ 빈 손바닥 강줄기로 흐르는 손금/ 긴 여행인 듯 패여 왔구나” -<그릇 하나>

“태양이 사라지면 내 생애 만유인력처럼/ 다가왔던 사랑은 낯익은 상자의 것들과/ 막막한 공간을 떠돌다가 잊혀질 것이다” <창고 속 우주>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이삿짐트럭을 몰고 꽃피러 떠났다” <아파트나무>

“그 풍경이 들려주는 연주곡은/ 코끝이 시렸다, 이별은/ 떠나온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것이라고/ 노랫말을 붙이고 싶었다” <갈대>



불빛: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 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산동네의 밤>

“기적 소리를 비벼끈 꽁초가/ 손가락 사이 불빛으로 켜질 때/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후회의 방식>

“조금씩 뚜렷해지는 스테레오 같은 창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채널을 갖는다/ 같은 시간 같은 음악을 듣는 이들은/ 서로를 잇대며 이룬 외로운 기지국이다”



쓸쓸함:

“길은 인연같이 뻗어와/ 막다른 곳으로 쓸쓸히 흩어지는 것을/ 가스통을 짊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보았다” <청춘은 간다>

“이렇게 막막한 밤이면 그립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쓸쓸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 <비에게 쓰다>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쓸쓸한 연애>



지난밤의 술 냄새를 벗지 못한 채 출근한 그의 하루는 관리자 비밀번호로 접속하면서 시작되었다. 게시판에 곰팡이처럼 붙은 스팸 메일들을 벗겨내고 익명성에 기생하는 폭력의 수위를 조절하고 눅눅한 밤을 쓰느라 젊음을 모독한 자들의 글을 추천해 주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였다. 성의를 표시하기에도 부족한 원고료를 들고 먼 곳에 다녀오기도 하고 사업 계획안을 만들거나 시상식의 사회를 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화詩畵를 만들어 발송해주는 일을 그는 가장 즐겼는데 줄탁동기를 기다리고 있던 영혼들이 깨어나 훗날 시인들로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어느 새 보안에 취약한 비밀번호가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의 빈 술잔으로 인연의 다리를 놓으며 시공간을 좁혀갔다. 하지만 그는 취하지 않는 밤이 안기는 피로감으로 점점 가난해지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평생 그의 서정시를 쓰게 될지라도 ‘점화되지 않은 청춘을 싣고 폭탄처럼 달리는’ 그에게 회원보호 약관들을 읽어 줄 수는 없었다. 끝내 그는 관리자의 비밀번호를 반납하고 떠났다. 더불어 비밀번호를 잃은 자들도 그 사이트에 접속하는 날을 줄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잘 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간혹 내가 접속하고 싶은 사람,
        서로 언약한 적 없어도
        그의 패스워드를 이해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일치해야 다음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

                            - <로그인> 본문 중

2. 사진과 내기 - 오래 된 편지로부터

지루하고 음란한 장마철, 폐가廢家가 궁금해서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주인은 없고 에코도 없고 어지럽게 현수막만 걸려있었습니다. 그 만장輓章 뒤로 더 이상 그리운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늘 갑작스런 이별이 문제입니다. 그것들은 생의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그 아름다운 시절(Belle Epoch)의 기억들을 통째로 털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균형을 잡을 때까지 멀미를 하게 됩니다. 인간을 퇴화, 혹은 풍화시키는 것은, 무기력감입니다. 우연히 자신의 오래된 기억들과 마주치고도 아무런 격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습니다. 겨우 비밀번호를 기억해 들어가서 폐가의 골방을 살피다가 이런 글을 찾았습니다.


<제목: 간이역불빛님께 번호: 403 작성자: 김솔 작성일:2000-08-04 조회수:21>


결국,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군요. 취하지 않고서 해야 할 이야기들을. 간이역불빛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더 치열해지자고 제 자신을 다잡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용서하시길. 그렇지 않고선 어떻게 다시 뵈올지. 늘, 취해 있어서 문제입니다. 술에, 사람에, 문학에, 일상에. 건필하시길.


<제목: 김솔님께 번호: 404  작성자: 윤성택 작성일: 2000-08-04 조회수:26>


뭐, 솔직히 말하자면 미안해하지 마세요. 똑같이 그렇게 술 먹고 허물없이 나눈 진지한 자리였다고 생각해요. 문학이라는 거 뭐랄까 딴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진솔한 흐름일 터인데, 무심코 흘려보냈던 안이한 제 말을 김솔님이 귀에 거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를 씁니다. 그래요. 시화를 만든다고 할 때, 예전엔 시를 쓰고 사진을 찾다가, 솔직히 지금은 사진을 보고 시를 써요. 그 점이 문학적으로 소홀하고 진정한 문학적인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요. 다만, 뭐랄까. 길들여진다고 할까요? 김솔님. 제가 사진을 보고 시를 쓴다고 문학을 져버린 것은 아니니까요. 좀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만나면서 느끼는 거지만 술을 먹더라고 정말 솔직하고 문학을 하는 사람이 별종이 아니라 이렇게 정말 똑같이 편한 사람이구나란 생각을 들게 하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보리밭이라는 시화예요. 솔직히 고백합니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제가 사진보고 시를 썼어요. 그냥. 그렇게 썼어요.

오래 전 무명의 밤에 간이역불빛이란 남자와 김솔이란 남자가 술집에서 만났을 때, 자신에게도 낯선 이름으로 낯선 상대에게 얼치기 김솔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시란 무엇인가, 문학의 고향은 어디인가 라며 거창한 술추렴을 했는데, 약간은 격한 감정으로 헤어지고 나서, 다음날 깨자마자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해서, 왜냐면 저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문학에 대한 제 생각을 발설했으므로, 신촌에서 출발한 택시는 안암동을 거쳐 회기동 가면서, 불편한 침묵을 털어낼 목적으로, 누가 제안을 하고 누가 손뼉을 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먼저 1월 1일자 신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낙선한 자에게 술 한 잔 거방지게 사기로, 6대 중앙 일간지를 일일이 나열하면서, 어차피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나는 소설가의 이름을 탐했으므로 절대 서로의 희망을 해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 택시 기사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청계 고가다리를 넘어오던 밤을 기억하시는지. 그때 아마도 저는 사진 속에 고정되어 있는 이미지가 문학의 질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겁니다. 제 깜냥으론 미분 불가능한 생을 임의대로 잘라내고 이미지를 꺼내는 순간 생은 완벽하게 재현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모든 이미지의 합보다 생은 더 넓고 풍성하다고. 그런데, 제가 간과하던 게 있었습니다. 그때 성택형의 소극적 변론과 오랜 침묵은 어쩌면 제게 깨달음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사진이 이미지를 고정한다는 생각, 그게 틀렸습니다.(중략)

<오픈스카이>님이 보내준 오래된 사진들을 보면서 장마철인데도 싹을 피워내지 않고 씨앗으로 웅크리고 있던 기억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면서 연한 상추 잎으로 피어나는데 어디서부터 솎아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매달려 있던 제가 어느 순간 수십 명으로 불어나더니 조잘조잘 말을 걸어오고 술잔을 건네 오고 전화를 걸게 만들고, 급기야는 이런 글을 쓰는군요. 그들 중엔 성택형과 술잔을 나누던 얼치기도 있습니다. 여전히 속죄가 부족하지 않았을까 지금에라도 폐가의 입구에다 윗글에 대한 답글을 달고 싶은데 그곳엔 더 이상 제 고해성사를 받아줄 사제가 없군요.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과 찍었던 사진이 행방이 궁금해집니다. 장마가 끝나고 갈바람이 불어오면 형의 시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땐, 싸구려 디지털 카메라라도 하나 사서 문자로 재현할 수 있는 세상을 담아볼 생각입니다. 저 보고 시를 쓰라고요? 아이쿠, 전 이제야 4년 전의 기억 속에서 문학의 본질을 감염시키던 바이러스들을 제거해낸 걸요. 그리고 아직도 사진 속의 풍경과 사물과 사람들에게 말을 걸 줄 모릅니다. 가을은 귀를 단련시키기 좋은 계절입니다. 갈喝. 2003. 7.19 김솔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우회로에 있다

                          - <주유소> 전문


3. 작가의 제 1 사명 -요절하지 말 것!

불면의 밤을 두렵게 만든 죄, 연애 대신 방랑에 몰입하도록 이끈 죄, 낙인찍히지 않은 말言들의 고삐를 놓아준 죄, 분노를 씹어 성대에 상처를 입힌 죄, 망각의 강 위에 방뇨한 죄, 길 위에 누워서 범죄자를 꿈꾸게 한 죄, 노새의 연애에나 필요한 글을 낳은 죄, 외로움 따위를 맹목적으로 과잉보호한 죄, 시계를 무기력하게 만든 죄, 빈 주머니를 오만하게 만든 죄, 유리창 속 풍경들을 청맹과니로 만든 죄, 어두운 방을 기다리게 만든 죄, 불멸의 교리를 퍼뜨려 혹세무민한 죄, 말하지 못하는 기관器官들을 학대한 죄, 자신을 섬기던 물건들을 매몰차게 방기한 죄, 술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자를 외롭게 한 죄, 그런데도 여전히, 손을 떨며 빈 술잔을 내민 죄. 그리하여 그 술잔을 받아든 자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채운 자 역시 엄연히 유죄이다.




#5. In&Out, 포장마차, 밤

        소주잔 속 지문의 소용돌이가 인다
        살갗은 타원은하처럼 유리와 밀착되어 있다
        그 중심에서 잔은 자전해 오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익히며
        조금씩 얼굴이 붉어져갔다
        포장마차가 있는 골목은
        불시착한 행성의 길,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력 때문인가
        문득 어지럽다
        가로등은 혜성처럼 꼬리가 길고
        숨 밖으로 알코올이 푹푹 증발한다

                     -<술잔의 지문> 본문 중


위 지문의 마지막 두 번째 행이 시작되면 멀리서 기차소리가 다가온다. 벌레들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는 가로등으로부터 카메라의 시선은 점점 낮아지며 행인의 발자국마저 지워져 있는 거리를 비춘다. 그 길 끝에 멈춘 마을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실내등이 꺼진다. 화면 왼쪽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공용 화장실 앞에 앉아 LPG 가스통을 보듬고 잠든 남자의 실루엣이 잠시 드러난다. 개숫물을 버리러 밖으로 잠시 나온 여주인을 뒤따라 카메라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주꾸미 무침을 한 남자에게 가져다준다. 그는 자신의 술잔을 채우면서 시집을 읽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반쯤 찬 술잔을 클로즈업. 연거푸 두 잔을 마신 그가 읽고 있던 시집을 펼쳐 뒤집은 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일어난다. 그것이 마치 처마 같이 보이도록 수평으로 클로즈업. 그러다가 그 앞으로 여주인이 지나가고 카메라가 자연스레 포장마차 밖으로 나온다. 화면 아래에서 그녀가 쭈그리고 앉아 개숫물을 버리고 있을 뿐 화면 위쪽은 온통 어둠이다. 다시 기차가 다가오고 화면 위쪽이 잠시 밝아지면 한 남자가 쭈그려 앉아 다른 남자에게서 가스통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기차가 사라지면서 서서히 암전.


#9. Out, 노천술집, 밤

화면의 중앙에서 격렬하게 언쟁하고 있는 남자 둘이 보인다. 그들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들 주위에 앉아서 맥주잔을 비우고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은 그들을 개의치 않는다. 단 한 남자의 표정에서만 불안감이 읽힌다. 싸우던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손을 끌고 기어이 자리를 떠나자 나머지 한 남자는 앉아 미지근해진 맥주로 분을 삭인다. 그때 종업원이 다가와 빈 술잔을 치우기 위해 다가온다.


종업원1: (머뭇거리면서) 혹시,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시인이신가요?

언쟁에 참여했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불안해하던 남자가 모퉁이로 사라진 이들의 그림자를 쫓아 달려간다.

        누가 씨를 뿌린 것도 아닌데
        햇살에 기대어 제 목숨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면
        문득 나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놓여진 술병에라도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생각들을 펼치고
        서로서로 나누고 함께하며
        우습거나 슬프거나 이미 떠나간 일이거나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리는 술잔의
        그 더워진 마음을 보고 싶다
        병뚜껑을 돌려 따면서 차가운 술이 어떻게
        뜨거움으로 마음 덥혀 오는지

                    -<희망이라 싶은> 본문 중


#13. Out, 거리, 밤

두 남자가 방음벽을 따라 등을 보인 채 위태롭게 길을 걷고 있다. 술기운에 장난기가 발동한 오른쪽의 남자가 옆의 남자를 벽 쪽으로 떠민다. 휘청거리면서 화단 안으로 밀려간 남자는 걸어 나오면서 소리친다.

남자: 시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장미의 가시지. 왜냐면 그 연약한 것이 릴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야. 내 손등이 독침에 긁혔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약국으로 가야해. 그렇지 않으면 이 밤을 넘길 수 없을지도 몰라. 웃지 마. 난 지금 너무 심각하다고.


        담장 틈에서 나뭇가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주 천천히 금이 자라도 좋았다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담장의 천형이었다
        상처를 제 안에 새기며 견디는,

             -<담장과 나무의 관계> 본문 중



4. <서정시를 쓰는 남자>를 읽는 남자

<서정시를 읽는 남자>를 쓰는 남자였던 그가 <서정시를 쓰는 남자>를 읽는 남자로 변신한 까닭은 쓸쓸한 연애 때문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정시를 읽는 남자>를 쓰는 남자를 독자라고 부르고 <서정시를 쓰는 남자>를 읽는 남자를 저자라고 부르자. 물론, 쓰고 읽는 행위 중 어느 것에 그들이 더 집중하는지에 따라 바꾸어 부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변신은 딱 한 차례 일어났다. -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쓸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편의 연애를 끝마쳤을 때 쓸쓸함이란 벼랑 끝에 선 자들의 주된 정서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고작 자신을 통째로 느끼는 일이라면 굳이 연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쓸쓸해질수록 그는 단단해졌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연애를 모색하면서도 지나간 연애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나는 흐린 가로등 불빛을 데리고 바람 속 해변을 걸었다 검푸른 파도가 부서지고 또 부서질 때, 내게도 저리 다가올 사랑이 있을까 포말은 백사장을 서성이다 되돌아간다 그리움도 이별도 이 밤에는 깨어 있구나 폐선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와 어두운 바다로 걸어가고 있었다

              -<을왕리 바다> 본문 중


그의 연애는 서정시 한 편을 읽다가 시작되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묵음의 문장들이 그에게 운명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그 운율은 이미 사라진 것이었으므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흥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서정시를 읽는 남자들이나 서정시를 쓰는 남자들을 찾아가서 물었다. - 서정시를 읽는 남자가 저자라면 서정시를 쓰는 남자는 독자이다. -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그의 가슴 속에서 빛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당신이 화분을 밀어뜨리고 나갔을 때
        운명은 첫 키스의 과거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2004/07/22 21:34 18초
        밖은 어두워졌고 나는 미래의 징후를 갖는다
        당신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불확정성 시간에 대하여> 본문 중

그녀는 서정시를 쓰는 남자나 서정시를 읽는 남자의 애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도 흥얼거리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그에게 새처럼 웃어 주었다. 천천히 날아와 실뿌리를 내린 그것은 곧장 둥치 굵은 기쁨으로 자라났고 그는 흥얼거림을 멈춘 채 그녀를 기억했다. 아니, 상상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반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물론, 여자가 그 사실을 겨우 알아차린 건 그의 구애를 받은 뒤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 멀리서 또 웃었고 그것이 마지막의 이별이었다. -이별이란 서로 다른 두 개의 별로 각자 건너가는 행위이다. - 그는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의 연애담에서 그녀의 이름이나 주소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녀와 눈빛이 일치했다 세로축 계단과 가로축 정차역이 각기 회전하다 멈춘, 검은 눈동자가 몇백 년을 건너온 듯 흔들리고 있었다 한 면이 다른 전면을 맞춰내기 위해, 우리는 잠시 잇댔다가 어긋나는 여정이었을까 루빅스 큐브 한 면만 겨우 맞춰온 내가 그녀를 다시 본다는 것은, 이 生을 분해해 조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하철은 떠났고 그녀와 단 몇 초간, 아마도 평생이 흘렀다

     -<루빅스 큐브> 본문 중

서정시를 쓰는 남자, 또는 서정시를 읽는 남자의 애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여자의 애인이 되기 위해서 그는 수 만 편編의 삶을 한꺼번에 살았다.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훨씬 집요하게 그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는 발소리 크게 내지 않고 천천히 공동묘지의 행간을 읽어갔다. 서정시는 벼린 삽이자 깨진 항아리였다. 출구에서 만난 산지기들과 술을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수 만 편의 삶을 관통하는 단 한 차례의 사랑에 대해 그들은 비웃고 비린 술을 끼얹었다. 서정시를 읽는 남자보다 서정시를 쓰는 남자가 그녀의 애인으로 어울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서정시를 쓰는 남자보다 서정시를 읽는 남자가 세상에서 더 환영받는다는 엉뚱한 이야기도 밤의 출구 앞에서 들어야 했다.

        목 안에 바늘을 품고 사는 사람들,
        목숨보다 질긴 줄이 당겨지고 있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하나
        통곡으로 제 안을 보여주는 건
        많이 끌려와 지쳤기 때문이다

                      -<울음 바늘> 본문 중


마침내 그가 첫 번째 서정시를 완성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의 서정시를 읽고 산 사람들은 꽃을 보내왔다. 죽은 사람들은 계절을 선물하였다. 황금색 양피지인 별 위엔 새로운 시인의 운명이 적혔고 사관史官의 검게 젖은 붓으로부터 별똥별이 떨어져 거짓 명성을 숨긴 무덤을 뒤집었다. 우주에서 그의 서정시가 읽히지 않은 곳은 오직 성채 같은 그녀의 가슴뿐이었다. 그가 매일 저녁 젖멍울을 핥을 때마다 공허한 이름이 어둠처럼 흘러나와 꽃을 죽이고 계절을 마음대로 바꾸었다. 그의 서정시는 죽음 뒤에도 버티고 있을 절망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산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었고 그것 때문에 소외된 죽은 자들이 매일 꿈으로 찾아와 더 이상 서정시를 쓴다면 그 여자를 데려가겠노라고 협박했다. 그래도 그는 사랑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우표 한 장의 힘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월의 내력이 적혀진 몸에
        겉봉 같은 외투를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제 몸에
        우표를 붙였는지 모른다

              -<외출> 본문 중

그는 서정시를 읽는 남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우주의 모든 진리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를 떠난다. 그가 멀어질수록 그의 미덕은 늘어났다.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 때야 비로소 여자도 그를 상상하게 된다. 그 날 이후로 그는 매일 밤 어두운 목소리로 나타나 그녀에게 달콤한 꿈을 안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침의 입구에 서서 그는 늘 마지막 행을 읽지 않고 사라졌다. 젖은 혼란함에서 깨어날 때마다 여자는 서정시를 쓰는 남자들이나 서정시를 읽는 남자들을 찾아가 마지막 행을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흥얼거림을 해독할 수 없었다. 겨우 어느 해몽가로부터 꿈의 조각을 현실로 바꾸는 비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맡에 거울을 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방이 어둠 위로 떠올랐을 때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찔함 때문에 하마터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놓칠 뻔했다. 마지막 행에서 그의 목소리가 멈추는 순간 그녀는 이불 속에서 양초와 그것을 꺼내 들고 목소리 쪽으로 비추었다. 유리창 턱에 걸터앉은 남자가 부엉이 깃촉 펜을 들고 양피지 위에 무엇인가 적으려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 밤에 마지막 행을 쓰려했다고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의 모습에 너무 실망하여 울 수도 없었다. 공허의 파문이 웃음으로 살짝 내비쳤다. 아침과 함께 그 방에서 사라진 건 <서정시를 읽는 남자>를 쓰던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문자 메시지가 왔다 점멸하는 도착 표시,
        오래 전 보았던 창문을 닮았다 가로등이 아이콘처럼
        자주 깜박이던 곳, 그 겨울밤 가끔씩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아직 여기 있다고 했던가

        언덕길 끝, 보일러 연통의 몇 볼트 온기로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피었다, 잔기침에도 화들짝 놀라는
        꽃 화분은 조금씩 금이 갔다 그리울 것이 많았으므로
        라디오 주파수는 별과 별을 지나 사람의 소리에 닿고,
        창문을 흔드는 바람이 캄캄한 궤도로 흘러갔다 깊은 밤
        뚝뚝 지는 수돗물은 둥근 별의 습관, 얼지 않은
        소리는 고드름처럼 일기장 행간에 매달렸다
        창 밖에는 외, 롭, 다 꾹꾹 눌러놓은 눈사람 눈 코 입

        그 겨울밤 시리우스, 빛의 속도로 도착한 전파처럼
        지금 메시지는 그 별에서 보내온 답신이어도 될까
        8년 224일 18시간 전 시리우스 별과 같은 혹성 언덕
        공중전화부스에서, 나는 아직 여기 있다고

                                        -<별의 기억> 전문


그래서 그는 <서정시를 쓰는 남자>를 읽는 남자로 변신하였다. 이미 자신의 혀를 잘라내었으므로 그를 세우는 건 침묵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서정시를 쓰는 남자나 <서정시를 읽는 남자>를 쓰는 남자로 알려져서 여전히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연애를 방해하는 서정시를 없애기 위해 그는 구충약을 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에 속해 있는 그로서는 하나의 이름과 주소를 지닌 채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어느 날엔 서정시가 아닌 것에다 오줌을 갈기려고 성기를 꺼냈으나 혼미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바짓가랑이를 적시고 말았다. 그의 슬픔은, 수 만 편의 삶을 단 한 차례의 사랑만으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너와 닮지 않기 위해 많은 별들을 지웠다 가끔은 팔목 긋고 떠내려온 낙엽처럼 포기하고 싶었다 그 동안 해진 실밥이 악착같은 나의 관절을 붙들고 있었다 눈동자가 물에 잠기면 다시 깜깜한 밤이었고, 물소리 깊어지는 자리마다 가로등 한 그루씩 자라났다 나는 썩지 않을 것이다

                  -<버려진 인형> 본문 중

오늘도 그는 서정시 한 편을 썼거나 아니면 자신이 오래 전에 썼던 것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시를 쓰거나 읽는 순간 우주의 모든 공백들은 저자와 독자를 똑같이 저자로만 기록한다. 더 이상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마치 나무끼리, 바위끼리, 별끼리 그러하듯이. 그래보았자 어차피 그는 단 하나의 이름만을 부를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그의 사라진 혀 속에 담겨 있다. 어쩌면 그가 읽거나 쓴 서정시라는 것도 단 한 편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바닥은 테이프처럼 검은 밤을 재생한다 두 다리는 한사코 화면 안이다 헤드폰을 둘러쓴 빠르고 시끄러운 길이 돌아간다 이탈하지 못한 길은 지루하고 정직하다 음악은 환각처럼 템포를 비튼다 다운될 러너에게 수건을 던지지 말라, 음악에 끝까지 다 맞서야 한다 숨 가쁘게 젖은 몸이 피사체로 흘러간다 갈림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갈 데까지 갔다가 지쳐 내려온 곳이 필생 한 발짝도 아니다 조금 더 도망칠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이 生에서 훔친 가죽이 불룩하다

                   -<밤의 러닝머신> 전문


5. 통계학자 P의 견해

정신분석학에도 조예가 깊은 P의 믿음 중에는 “우주를 통째로 비추는 거울 같은 책이 세상엔 반드시 존재한다. 적어도 모든 책은 그것을 완성한 작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은 독자들의 성향까지 반영한다.” 라는 게 있다. 어느 날 밤 독서를 멈추고 찾아든 술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세상으로 태어날 운명을 지닌 한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에게 사흘의 시간만 허락해 준다면 중압감으로부터 나를 풀어주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이틀 만에 그에게서 메일이 왔다. 그는 책을 품은 컴퓨터 파일 속에서 모든 단어들을 추출한 뒤 사용 빈도를 일일이 세고 유의어나 활용어를 묶었다고 한다. 괄호 안의 숫자가 그것이며 자주 등장하는 순서대로 정리하였다.


“나(78) 보다見(67) 길(38) 밤(32) 끝(종점 포함, 28) 바람(25) 소리(25) 손(24) 눈물(23) 꽃(22) 몸(21) 사내(19) 날日(19) 기차(지하철, 열차 포함, 19) 둥글다(동그라미, 원 포함, 19) 걷다(18) 비우다(17) 여자(여인, 그녀 포함, 17) 비(빗방울, 빗물, 소나기, 장마 포함, 17) 붉다(16) 바닥(16) 별(16) 시간(16) 삶(生 포함, 15) 어둠(15) 먼지(15) 지하(15) 밖(15) 잎(14) 기억(추억 포함, 14) 누구(14) 뜨다(13) 불빛(13) 검다(13) 뿌리(13) 나무(13) 벽(13) 균열(틈, 금 포함, 12) 고양이(12) 가로등(12) 사람(11) 공터(11) 유리(11) 담장(담벼락 포함, 11) 울음(11) 멀다(11) (이하 생략)”

그는 위의 단어들로 완벽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다소 엉뚱한 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한 문장에 사용된 단어의 합 - 괄호 안의 숫자 - 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10000부터 매번 1씩 줄여가는 알고리즘을 반복한 결과, 합이 101인 경우에서 아래와 같이 가장 시적인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했다.

1. 나(78)는 유리(11)창 속의 고양이(12)다.
2. 뿌리(13)로부터 몸(21)을 본다(67).
3. 사내(19)는 꽃(22)의 시간(16)과 기억(22)의 틈(13)을 비웠다(17)
4. 먼지(15)의 눈물(23)은 바람(25) 소리(25)보다 검다(13).
5. 길(38) 밖(15)의 그녀(17)에게로 나무(13)가 걸어갔다(18).
6. 먼(11) 가로등(12)의 울음(11)이 꽃(22)의 바닥(16)에 붉게(16) 뜬다(13).
7. 빗방울(17)의 손(24) 끝(28)에서 둥글어지는(19) 불빛(13)
8. 바람(25)과 기차(19)와 담장(11)과 삶(15)과 별(16)이 어둡다(15).

왜 그 시인은 비밀번호로 101이란 숫자를 사용했을까? 그의 의문은 여기에서 멈추었다. 왜냐면 내가 수화기에 대고 너무 크게 웃었기 때문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책 몇 권과 통계학 원서 몇 권을 번갈아 읽고 있던 그는 바흐의 음악과 그것이 작곡될 당시의 밀 값과의 연관성을 발견해내고 그것으로 졸업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겨울 동안 그는 바흐의 미완성 교향곡 <푸가의 기법> 마지막 장을 완성하였는데 - 작곡이 아니라 프로그래밍이었다. - 그때도 그는 바흐의 악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리의 높이와 길이와 색깔 등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였다. 그것을 듣고 있을 때의 황망함이란. 나는 누군가의 목이라도 물어뜯고 싶을 정도였다. - 바흐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예술가들을 칭찬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고작 몇 밀리그램의 카타르시스를 짜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분량의 고통이 그들의 고독한 밤을 다녀가야 하는지 이해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창조의 순간은 분석에 사용된 시간의 합보다 훨씬 크고 완벽하다. 게다가 예술은 무의식의 허공에서 자동기술Automatism 되는 양귀비꽃의 씨앗이 아니라 의식의 진창 속에서 단련된 직관을 통해서만 겨우 발견해 낼 수 있는 연蓮의 그것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자주 말하여지지 않고 침묵 속에 숨겨진 단어야말로 오히려 진리의 단서가 아닐까.

“낙엽(3) 라디오(3) 이름(3) 모르다(3) 오토바이(3) 얼굴(3) 오후(3) 아침(3) 옷(3) 어머니(3) 이별(3) 이정표(3) 운명(숙명 포함, 3) 흔적(3) 사진(3)우표(3) 달빛(2) 가로수(2) 새벽(2) 낮다(2) 접속(2) 열매(2) 공사장(2) 은하(2) 존재(2) 아무(2) 계절(2) 신호(2) 색깔 (2) 출근(2) 연애(2) 목숨(2) 창가(2) 인연(2) 보도블록(2) 주차장(2) 침묵(2) 골목(2) 그림자(2) 자정(2) 가라앉다(2) 표정(2) 땀 (2) 소인(2) 행인(2) 거리街(2) 자전거(2) 노래(2) 가족(2) 친구(1) 벽돌(1) 행성(1) 아프다(1) 슬프다(1) 무덤(1) 시대(1) 왜(1) 우체통(1) 여백(1) 그림(1) 습관(1) 약속(1) 대문(1) 출구(1)”

하지만 자신이 완성한 바흐의 유산에 도취되어 있던 그에겐 아무 말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 강사가 되어 있는 그는 이제 초현실주의 선언문의 내용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시인의 무의식에 101이라는 숫자가 내재되어 있는 이상, 자신이 임의로 조합해 낸 위의 여덟 개의 문장들 중 몇 개는 필경 그 시인의 다음 시집에 사용될  것이라고 그는 돌처럼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예술가는 물론이거니와 과학자와 정치가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는데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시집을 처음부터 아랍인들처럼 소리 내어 읽었다. 행간을 뒤지게 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연주를 듣지 않는다, 라고 누군가 썼다고 들었다. 한밤의 흥미로운 잡담 정도로 치부하려다가 말고 마지막에 P의 의견을 싣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이 시집은 씌어진 것이 아니라 읽혀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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