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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제작> 中/ 《문학사상》 2007년 6월호


시가 닿을 수 있는 극단의 지대

시가 매력적인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중 하나는 일상과 현실이 닿을 수 없는 데에까지 상상의 나래와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눈으로 읽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으로 진술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순수한 상상과 사유, 순수 성찰만으로 시가 구성되는 경우가 그것일 터이다. 일상과의 접점이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출발의 지점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시는 현실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되 그곳을 벗어난 너른 지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 지대는 도무지 일상에서 습득된 사유의 틀이 무연해져서 암중모색하듯 사유의 새로운 길을 더듬어 내야 하는 곳이다. 때로는 허우적거림과 때로는 망연함, 혹은 허공에 발 딛고 있는 듯한 공허함이 지배하는 것도 그 너른 지대의 속성일 것이다.
시인은 누가 끌어들이는 것도 아닌데, 그곳에 왜 속절없이 빠져 버리는 것일까. 그 무엇인가가 불쑥불쑥 자아를 강타하여 시인의 내면에 구멍을 내는 것이기라도 하는 것인가. 환상인 듯도 하고 초현실인 듯도 한 그곳을 향하는 시인의 몸짓에는 그러나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자 하는 위악적 태도가 깃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지대를 그리는 시인들의 시선에는 머뭇거림이 없으며 이 지대 안에서 시인들은 거칠 것이 없이 세계를 누린다. 이 지대는 자유의 공간이자 무한의 영역인 것이다.
일상의 시공간적 형질로부터 벗어나 있는 까닭에 이곳은 현실감이 없으며 이곳에서 피어나는 꿈과 상상은 질료로서 간주되기 힘들 것이다. 이곳의 꿈과 상상은 단지 잠시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지는 신기루로서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꿈과 상상의 힘은 현실에 육박하여 새로운 현실을 강제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꿈과 상상이 마치 현실의 시공간을 점유하기라도 하듯 일상의 가운데에 부정할 수 없는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길러 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실의 적확하고 합리적인 인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꿈과 상상 역시 올바르게 가꾸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무분별한 배설이나 무차별적인 무의식의 분출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훌륭한 시인들은 이에 대해 결코 무자각적이거나 무책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다 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땅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오늘은
        차갑게 수장된 심해가 그리운 날이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린다
        먼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 윤성택, <아틀란티스> 전문, 《문학사상》5월호

위의 시가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일상의 현실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영역의 세계인가? 비현실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명료하고, 현실이라 하기엔 또한 경험되지 않는 대상을 위의 시는 지시하고 있다. 이 시는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어 기억이라 하기에도 부적절할 듯싶은 오랜기억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바다 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리는 기억>이자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이다. 이는 그 대상이 명시적일 듯하면서도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그 어떤 세계로 <쑤욱> 잠수해 들어가 그곳 미지의 영역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이렇게 명백하긴 해도 이 세계가 우리에겐 여전히 낯설고 비현실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비현실감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유도하는 것처럼 작위적이거나 무분별하지 않다. 오히려 정제되어 있고 가지런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보이는 세계인 듯 질서정연하고 안정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시인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실제로 경험하고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시인의 언어는 흐트러짐이 없이 차분하다. 우리에겐 낯설되 그에겐 익숙한 그러한 세계, 그곳은 곧 시인이 너무도 자주 드나들었던 그만의 상상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곳에 그 혼자서만 은밀히, 그러나 공공연히 드나들었기 때문에 시인은 그곳에서 자신이 갖게 되었던 모든 정서들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두려움>이라든가 <막막함>, <허우적거림>, <두근거림>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정서는 미지의 공간을 홀로 찾아 나선 이가 경험하게 되는 모든 감정들일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공간 속에 던져진 <나>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시인이 제시하는 이들 정서들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던져진 공간의 아득함과, 그러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곳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곳인가? 제목에서 말하듯 그곳은 <아틀란티스>라는 사라진 대륙에 대한 상상적 구현에 해당할 것인가? 즉 말 그대로 <차갑게 수장된 심해>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시인은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단지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자아의 강한 열망과 의지는 시가 그처럼 단순하게 쓰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거나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는다는 것,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자라 올>라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 상상적 행위는 그 무엇을 향한 강한 열망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인데, 우리는 이들 시적 표현을 통해 시인이 단순히 멀리 있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그 세계를 현실의 수위로 끌어올려 현실 세계 속에 편입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시인은 그가 탐험한 미지의 영역을 <빛>으로 삼아 현실에 <꽃>과 <향기>를 만들어 내고 싶어한다. 물론 그 <꽃>은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 올린 꽃>이 될 터이다. 시인은 <아틀란티스>를 통해 <빛>과 <꽃>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시작 메모 기대면 어쩌면 기억이 아주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즉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흔적조차 잃어버린 <마음의 대륙>이 아닐까 한다.

― 이후 후략 ―

■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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