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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읽은 윤성택의 『감(感)에 관한 사담들』

시간의 아포리아(aporia)와 자아의 프로세스(process)

박진

(문학평론가)

“만일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나였던 그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윤성택의 새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이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고 할 때, 그 기억은 개인적 경험의 구체성을 향하기보다 시간에 대한 사색적 성찰로 모아진다. 기억 속에서 우리는, 예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과거의 것을 보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것의 기호이며, 이미 지나가 버렸지만 아직 머물러 있는 시간의 수수께끼다. 이 같은 기억의 역설에는 시간 개념 속에 입을 벌리고 있는 오랜 아포리아(aporia)들이 뒤얽혀 있다. 시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흘러가는지, 존재할 것(미래)이었다가 존재했던 것(과거)으로 사라져버리는 원자적 순간들의 흩어짐 사이에서 현재란 과연 실재할 수 있는지, <시간-내-존재>로서 현존재의 지속성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진정 가능한 일인지, 출생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인간의 숙명적 시간(temps mortel)과 무한 또는 영원에 가까운 우주적 시간(temps cosmique)은 어떻게 괴리되지 않을 수 있는지 등등. 윤성택의 『감(感)에 관한 사담들』은 이러한 시간의 아포리아에 맞서 실존적 궁지를 헤쳐 나가려는 다양한 시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집이 유독 기억에 집중하는 것은 <긴 과거>인 기억이 <긴 미래>인 기다림*과 더불어 한 점에 불과한 현재의 불안정성을 지속성의 감각으로 붙들어 두는 인력(引力)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분산되어 사라지는 순간들 속으로 <지나간 현재>(기억)와 <다가올 현재>(기다림)가 밀려들어오지 않는 한, 현존재가 시간 속에 거주하기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윤성택은 특히 과거의 침전물인 기억을 통해 시간이 머무르는 장소를 마련한다.

 

바닷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땅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차갑게 수장된 심해의 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린다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 「아틀란티스」 전문

 

과거의 <거대한 유적>이 가라앉은 <심해>는 잊힌 기억이 <수장된> 공간이다. 이 시에서 시간은 수평으로 뻗어가는 대신에 수직으로 깊어지고, 과거의 존재물들이 머무를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획득한다. <가라앉>은 잔해와 <떠오르>는 빛의 형상은 잃어버리고 되찾은 시간 경험의 생생한 이미지인 동시에, 황급하게 마구 내달리는 시간을 현재와 이어주는 중력-부력의 상관물이다. <허우적거리며/필사적으로 자라 오>르는 <아까시나무>는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 나, <관절을 꺾고 웅크>려 잠든 나를 어디선가 자꾸 부르는 또 다른 나일 것이다. 아까시나무가 <뿌리>의 거친 <숨>을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의 <향기>로 내뱉듯이,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존재의 흉터를 간직한 시간의 아포리아 앞에서 현존재의 전체성을 그러모으는 실존적 저항을 감행하고 있다. <땅속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뼈마디>와 <별자리> 모양으로 꺾인 <관절> 등은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 숙명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을 겹쳐 놓으면서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고 간섭하는 시간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시간을 공간화하고 입체화하는 상상력은 <시간이/이제 이곳으로 흘러들어 머물게>(「새벽」) 하거나, <시간을 겹겹 접>어서 <생생한 과거를 이제 펼칠 수 있>(「비망록」)게 해준다. 그것은 오늘의 일기를 뜯어내면 <뒷장의 어제가 내일까지 이어>(「일기」)지듯, 파열되고 찢긴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다시 연결하는 시적 작업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상상력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다른 시간>들과 거기에 있을지 모를 <다른 나>들에 대한 불안한 예감을 드리우곤 한다.** 공간의 이동을 시간의 이동으로 변환한 시 「붐비는 공중」에서는 그 불길함이 죽음의 그림자로 떠돌고 있다.

 

밀봉된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판을 누른다

스위치 윤곽이 희미하다 비석처럼

얼마나 많은 습관이 새겨진 것인지

닳아가는 과거 같은 어떤 기판에선

생이 오래도록 기념되기도 하지만,

먹구름 구르릉거리는 수직 통로를 따라

전주인의 고지서처럼 낯선 누군가도

얼마간 지문을 남겼을 것이다.

 

지붕 없이 창문만 내 것인 볕은 방향이 바뀌고

벽지에도 서서히 금이 생기는

이 아파트에서는 시간도 비틀려 휜다

먼 생의 손끝이 부르는 시공간이 층층이 열린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의 심폐가 계단을 깊게 들이마시는 저녁,

 

한 평 공간 속에서 몸이 솟구치는 동안

거울 안에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

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이 겹친다

(중략)

가만히 허공에 떠 살다갈 이력들,

사람을 길어올려 조금 더 밝아지는 창문처럼

사십 미터 높이 불빛 붐비는 무덤이 있다.

— 「붐비는 공중」 부분

 

이 시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공간의 수직적 이동은 시간이 <비틀려> 휘면서 다른 <시공간이 층층이 열>리는 비일상적 광경으로 묘사돼 있다. <숫자판>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은 생생한 기억을 불러내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닳아가는 과거>와 희미해진 <비석>의 이미지를 환기시킬 뿐이다. 이런 상황은 <허공에 떠> 있는 <아파트>의 <밀봉된 엘리베이터>라는 시의 무대와 무관하지 않다. 땅에서 분리된 허공, 하늘과 단절된(<지붕 없>는 아파트) 공간에서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시간과 괴리된 인간에게는 죽음(<무덤>)을 향한 존재의 숙명적 시간만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거울>에 비치는 <노인이었다가 아이였다가 나였다가/타인이거나 근친인 외면(外面)>은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 나-타자들의 얼굴이자, 시간의 닻을 잃어버리고 시간의 중력 밖으로 이탈한 존재자들이 겪는 공허한 무의미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윤성택 시인이 궤도를 도는 <달>의 <인력>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탯줄>과 <만삭>으로 잠든 아내의 여린 <호흡>을 한데 묶을 때(「윤이든」), <시간으로 채워진 심해의 산소통을 호흡>이라 부르고 <공기가 머무는 입술>에서 <밤하늘>을 발견할 때(「숨」), <시간의 굉음 안에 있>는 <간빙기>의 나무들과 <인간의 일생>을 포개놓을 때(「나무는 달린다」), 이는 죽음 앞의 존재가 감당해야 하는 <텅 빈 시간>(「막차」)을 충일한 우주적 시간과 매개하려는 힘겨운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이 시집에서는, 43억 광년 떨어진 <백색왜성이 빛을 뿜으며 식어>가는 시간이 <문간에 걸터앉은 자취방>(「GRB 101225A」)의 기억을 감싸 안고 있으며, 어느 <견딜 수 없는 순간은 이만 킬로미터나 떨어진/단풍나무를 물들이는 고요의 시간>(「타인」) 속으로 가만히 스며든다. 빈곤하고 불안정한 실존적 시간을 우주적 시간과 융합하는 시간의 연금술은 이렇듯 다채로운 리듬과 의미로 가득한 제3의 시간, <시적 시간>을 창출해낸다.

『감(感)에 관한 사담들』에서 우주적 시간의 인력은 신화적인 시원의 성격을 띨 뿐 아니라 첨단과학기술의 상상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다운로드」에서 <잎잎의 주파수를 열어놓고/가혹한 지구의 들판에서/뿌리가 흙속을 가만히 더듬>는 봄꽃들의 존재는 <다 닳은 드릴이 바닥에서 헛돌고/무섭게 휘몰아치는 돌풍이 불어와도/교신을 끊지 않>는 화성 <탐사로봇 스피릿>으로 변형된다. 이어서 <송수신이 두절된 탐사로봇처럼/결함을 복구하느라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하는 누군가>의 모습에는 더 큰 세계와의 연결을 회복하려는 시적 자아의 절박한 모색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또 다른 시 「기류(寄留)」에서도 <태양계 끝에 가 있는> <탐사선>이 보내온 <판독불능의 신호>를 <황금음반>이 틀어주는 <음악>으로 듣는 나, <방안에 떠 있는 어떤 입자 속 제국에> <기류>하면서 <몇백억 킬로미터 밖 동체>를 감지하는 나는, 우주와 교신하며 우주적 시간의 궤도를 도는 탐사선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의미 없이 흩어져가는 삶의 시간에 우주적 시간의 인력으로 닻을 내린다 해도, 시간을 통과하여 지속하는 자아의 동일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심리적 불연속성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감각도 스스로 편애하는 것 있어/이별의 장소도 바꾸고/아슴아슴 상처의 처소도 바>꿔가는 거라면(「새벽」), 기억조차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통합하는 지속성의 근거일 순 없지 않을까? 이번 시집에서 수시로 고개를 치켜드는 이런 질문들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다른 나-타자>의 형상을 하고 반복적으로 회귀한다. <내가 놓친 나는 세계를 떠돌다 어느 날 찾아온다/먹먹한 눈의 잔상에는 밝아도 보이지 않는/또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역치(閾値)」), <나는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내 성향이다/(…)기억할수록/점점 타인이 많아진다>(「정류장」)는 고백 등은 모두 이 같은 회의와 불안에서 불거져 나온다. 특히 시간의 <문>(「텔레포테이션」「데자뷰」), <터널>(「해후」「환승」), <맨홀>(「봄의 섬광」「신파」) 등의 이미지와 시간 여행의 상상력이 결합된 시들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자아의 단일성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의문에 부친다.

 

문을 넘으면 과거의 내가 사라지고

불확실한 내가 만들어진다

한 겹 한 겹씩 시간을 두르고

둥둥 어디로든 흘러다닌다 한때,

오래도록 문턱에 있던 적도 있다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있으나

위태롭게 커가는 희망 끝에는

터질 듯한 공포가 번들거린다

때가 되면 문과 문을 통과하며

나를 이동시켜야 한다

 

의식은 끈끈한 점성으로 버틴다

수많은 문을 지나며 내가 나를 믿지 않을 때

(중략)

문의 망막으로 스캔되는 그 짧은 동안

시간의 테를 두른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텔레포테이션」 부분

 

미래를 향한 시간의 이행은 이 시에서 물체를 양자 수준으로 분해했다가 재생성하는 방식의 원격이동(텔레포테이션)에 비유된다. <텔레포테이션>이 그러하듯, <과거의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매번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머무르고 싶은 <문턱>에서 <끈끈한 점성으로 버틴다> 해도 시간의 움직임을 막을 순 없다. 이처럼 자아의 완전한 해체와 재구성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자아의 동일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정서가 이 시를 지배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나>가 아닌 다른 의미의 정체성이 모색돼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향해 최대로 열려 있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새로운 개념의 정체성이 아닐까? 혹시 <텔레포테이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계-내-존재를 부단히 재구성하는 실존적 작업의 이미지로 읽힐 수도 있을까?

윤성택의 『감(感)에 관한 사담들』에서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몇몇 장면들과 만나게 된다. 가령 <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내게서 보내온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기류(寄留)」)라는 시적 화자의 되뇜은 어떤가? 여기에는 다른 시공간의 또 다른 나와 교신하며 나에게서 나 자신으로 스스로를 전승하는 독특한 자아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이런 모습은 <내 몸 낱낱이 교환>이어서 <나는 매일 나를 바꾸>지만 <내부에도 열려 있>는 <채널>을 통해 서로 다른 자아들을 <광활한 네트워크로 (…) 연결>(「거리의 시냅스」)하는 자아의 역동성과도 통할 수 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동일한 자아가 아닌 자아들의 연속, 자아들의 물결, 자아들의 프로세스(process)로서의 정체성이자, 나의 무수한 가능태들로 이루어진 자아들의 네트워크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그런 자아들이 <흩어지면서 이루는 하나의 공명>, 그 개방성과 역동성의 힘으로, 윤성택 시는 지금 또 다른 <시간을 열어>(「빗소리」)나가고 있다. 이질적인 시간들의 무한한 조합을 통해 그 상상적 변주의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존적 시간을 잉여 의미로 풍성하게 하면서. 때로는 우연이거나 꿈속인 듯, 감각과 기억의 상호작용으로 응결되는 시간의 수정(crystal)을 만들어내면서. 끝.

 

 

 

* 이 시집에서 <기다림>이 부각돼 있는 시로는 「응시」 「떠도는 차창」 「지문」 「화가」「정류장」 등이 있다. 기억만큼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이들 시의 <기다림> 역시 다채로운 시간의 리듬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 이런 경향은 윤성택의 첫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 2006)에서도 발견된다. 일례로 「지하에서의 실종」은 <CCTV 안>에 존재하는 다른 시간대의 자기(살아 있는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 「후회의 방식」은 시간이 거꾸로 되감기며, 살인과 자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역순으로 지워지는 광경을 그려 보인다. 이 외에도 「농협창고」 「창고 속 우주」「시간의 이면1」 「시간의 이면2」 등은 앞으로 살펴볼 시간의 이동과 정체성 문제 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첫 시집의 시편들이다.     

 

 

 

박진

ㆍ저서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공저)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등,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ㆍ현재 국민대 교양과정부 교수

 

 

※ 《현대시학》 2013년 8월호 “윤성택 시집 분석” 게재 평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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