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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2003년 겨울호 계간비평 (김은정/ 문학평론가)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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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을까. 시간을 한 템포 느리게 하고 가만히 볕을 쬐며 풀향기와 바람의 감촉을 느낄 여유. 이 시는 앞으로만 무한질주하려는 나에게 시간을 거슬러보라고 등을 떠민다. 이 안타까운 여유가 아름답다.
  먼 길을 가다가(그것도 깜깜한 밤이면 더욱 그렇다) 문득 스치는 주유소의 풍경은 낯설지 않아서 좋다. 한 두 그루의 나무와 어깨동무를 하고 이방인을 하루종일 기다리는 그 고즈넉함. 그 기다림이 이 시의 전조등이 되어 우릴 이끈다. 그 불빛은 '사랑'과 '떠남'이라는 화자의 내면을 비춘다.         
  '주유소'와 '사랑'이라는 불협의 이미지를 시인은 '휘발성'으로 묶었다. 엄격히는 '기름'과 '사랑'일 것이다. 불에 연소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름의 이미지는 불안하고도 불온했던 청춘의 열꽃인 사랑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사랑의 절정을 지나 끝난 자리, 더 이상의 지속이 무의미해질 때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 끝자리에서 떠남은 존재한다.
  떠남은 새로운 시간, 공간으로의 진입이다. 그러나 완전한 새로움은 아니다. 언제나 그 전의 시간, 그 전의 공간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을 딛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주유소'는 그래서 풋사랑을 딛고 성숙한 사랑을 향해 힘차게 엑셀레이터를 밟고 싶은 화자의 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그리운 것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추억들 속에서 그래도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떠남'을 시도하는 화자의 용기 때문이며, 이것이 과도한 센티메탈리즘에서 이 시를 조금이나마 건져내고 있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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