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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詩, 오늘의 좋은 시 中

2003.03.02 17:43

윤성택 조회 수:5806 추천:80

         흔적


         두 다리가 없는 사내는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 있다
         그가 밀고 가는 삶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동전들 굴욕의 또 다른 얼굴처럼
         바구니에 들어 있다
         손이라도 밟힐 때면
         올려다보는 그의 아랫눈동자가 희번덕거린다
         무리의 행인이 건널목을 건너자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누런 가래침을 뱉는다
         그때마다 핏줄 같은 전선을 따라
         고무 속에서 흔적 없는 다리가 꿈틀거린다

         지친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세상을 품고 산다는 것일까
         언젠가는 그의 꿈이 부화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밤마다
         고무 속에서 완성 되가는
         희고 단단한 다리로 生의 건널목을
         건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한낮 노래를 읊조리며
         가장 낮은 세상을 굽어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느릿느릿 자리를 옮길 때
         쓸리는 바닥,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

                                ― 『현대시학』(200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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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연은 다리 없는 걸인에 대한 관찰기록장에 지나지 않는다. 제2연에 가서 시인은 몇 가지 상상을 해본다. 바퀴 달린 파자 위에 엎드려서 기어다니므로 "지친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세상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닌가. 흡사 닭이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 듯이 그의 꿈이 언젠가는 부화되는 것이 아닌가. 꿈속에서는 "희고 단단한 다리로 生의 건널목을/ 건너는" 그, 그래서 가장 낮은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는 마지막 행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비록 "흔적 없는 다리"이지만,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햇빛도 꺾는다? 닳은 고무 틈새에서는 숙연함을 느껴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이 시를 살리는 것은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이다. 우리 주변에 많고 많은 사람과 사물 가운데 어떤 것을 시의 소재로 가져오기는 쉽지만 그것을 '시'로 만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체험과 상상력의 적절한 버무림이 이 시를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박명용, 최문자, 이은봉, 이승하 편. 『푸른사상』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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