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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지하주차장 - 강인한 시인 단평

2004.11.21 11:07

윤성택 조회 수:4173 추천:100

〈내가 읽은 올해의 좋은 시 / 강인한〉 - 원탁시 49집 게재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느라
형광등 불빛은 가늘게 떨고 있다
그 경계를 잘라내는 환풍기는
울음이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이 곳을 깨우기 위해 사이렌은
입구에서 검은 침묵을 매만진다
누구나 지상과 멀어지고 싶지 않듯
지하로 지하로 차를 몰고 내려온 이는
잘못 든 길처럼 숙명적이다
그가 홀연 빠져나와 차문을 닫을 때
지하층 전체에 일순 울리는 소리,
누군가 들뜬 페인트처럼 후들거리며
벽면에 기댄다 어쩌면 통곡은
지루한 절차일지 모른다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고 우회와 우회를 거듭하며
나선 방향으로 낙하한 하역의 공간,
지하로 내려갈수록 묵직한 나사가
조여 오고 있다 그가 못질하듯
구두소리로 걸어나간다 깊은 밤처럼
고요한 지하주차장,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주차선이 문득
영정 사진에 가 있다 또 누군가
차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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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喪家)에 조문 가는 풍속도 많이 달라졌다. 망자의 빈소가 장례식장이거나 대학병원 장례식장인 경우가 많다. 호황을 누리던 결혼식장이 슬그머니 하나둘 장례식장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병원 지하 주차장. 병원의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겠고,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밤처럼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의 나선 통로를 돌고 돌아 주차를 하고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문상객의 모습이 이 시에서 치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윤성택 시인(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은 대상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정확한 묘사력이 요즘의 신인들 가운데 매우 뛰어나다. 그가 내놓는 시들은 한결같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안정감이 있다.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은 일상적이지만 그 속에서 그는 삶의 표정을 집어내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지상과 지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찾아나서는 나선의 우회가 이 시의 골격을 이룬다. ‘어둠 속에 떨고 있는 형광등, 먼지가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 환풍기, 구급차의 사이렌과 지하주차장의 검은 침묵, 차문을 닫으면서 지하층의 공간을 울리는 소리, 관에 못질하듯 걸어나가는 구두소리’ 등은 감각적이면서 전율을 동반하는 공감으로 전달된다. 특히 마지막에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주차선이 문득, 영정 사진에 가 있다’는 표현은 전율 이상의 충격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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