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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수 오 분간 - 홍예영 시인 단평

2005.07.01 12:02

윤성택 조회 수:3886 추천:93

《군살 없는 암소의 발목처럼》 / 2005년 대전충남시선 제2집 中 홍예영 시인평/ 『심지』

탈수 오 분간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해져 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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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젖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건조시키는 방법으로 시인은 빨래를 한다. 문제 풀이를 하듯 탈수하는 과정을 짚어본다. 세탁기는 엉킨 것이 있어야 원심력을 얻는다. 바지 뒷주머니에 애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는 젖었다는 점에서 엉키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다. 젖은 것들 때문에 원심력을 얻은 세탁기가 부르르 떤다. 탈수에 필요한 떨림은 오 분 동안 이어진다.
마스카라가 번진 그녀를 안을 때의 떨림 역시 세탁기에서 본 원심력이 발휘되었던 오 분이다. 많이 젖어 있던 그녀는 탈수되느라 떨린다. 문제 풀이의 쉬운 예제 격인 그녀의 젖은 눈물은 세탁기 속 원심력처럼 시 전체에 힘을 싣고 있다.
세탁기는 울음을 비울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가 없다. 시인은 그러한 탈수 오 분간, 울음들이 탈수되는 세상의 오 분간을 가늠해 본다. 엉키어 울음을 털어내며 낡아가는 빨래, 빨래처럼 헤져가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세상 오 분간을 바라보는 시의 눈이 신선하다.

- 홍예영 시인 (1953년 전남 나주 출생. 2000년 『시와시학』등단, 2003년 시집 『그런데 누구시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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