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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문제작 中

시/ 소통의 시학
- 은폐된 진실 찾기 혹은 자기 성찰의 타전


파도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텅 빈 밤이면 그립다던가
보고 싶다던가 모스부호처럼
문자메시지를 타전하고 싶네

- 〈비에게 쓰다〉 부분

윤성택의 <비에게 쓰다>(<현대시학> 5월호)는 시적 주체의 깊은 쓸쓸함에서 솟아난 소통 욕구의 발현이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는 것"이라는 전언은 소통으로의 자연발생적인 욕구를 말한다. 비에게조차 ‘문자메시지를 타전하고 싶다'는 말은 쓸쓸함의 깊이를 감지하게 한다. '깊어지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순간'처럼 '텅 빈 밤'을 채우기 위한 그리움의 욕구도 타자를 향한 소통의 욕구에서 소생한다. 텅 빈 밤의 그리움의 대상처럼, 도시 기계들의 소음 뒤로 사라져버린 빗소리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문자메세지의 수신자로 부상한다. 가득 차면 넘칠 수밖에 없는 그릇의 물처럼 소통의 욕구는 필요의 갈증에서 넘치듯 흘러나온다. "곳곳의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한 밤의 욕구"에서,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는 자동차불빛"의 억압에서 비롯되는, 비에게 타전하고 싶은 소통의 욕구는 드디어 자연발생적 현상이 되었다. 나를 포박하는 외부의 대상들이 억압으로 타전되어 타자로의 지향을 열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포화상태의 폐쇄공간은 비가 새어드는 소통으로의 틈새를 스스로 일으킨다.
의도된 소통의 시학이 아니라, 자연발생적 소통의 시학, 혹은 소통으로의 시학이라는 사실에 소통을 야기한 타자들의 동시대적 의의가 자리한다. 지금.여기를 부정하여 소통의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시적 주체의 반성적 태도는 자아를 부정하는 자조적 언술의 가면에서 두드러진다. 자연발생적 소통의 욕구가 일으킨 자연발생적 가면의 태도로 장치한 동시대성이기도 하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조적 태도, 곧 가면의 태도는 허위가 아니라, 사실로서 자조라는 동시대성이다. 은폐된 진실, 혹은 가면 밑의 진실을 찾는 소통의 시학이 지금.여기의 자연발생적 시선임을 자기부정의 시선이 자연발생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달의 시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