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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단평 (김남호 평론가)

2003.10.10 10:59

윤성택 조회 수:4334 추천:81

[추천詩] 주유소 / 윤성택  




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ㅡ<<문학사상>>(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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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가을 하늘 한 귀퉁이에 대책 없는 그리움처럼 이름 지을 수 없는 형상들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잘 빗질된 햇살이 가지런하게 양지쪽을 만드는 초가을 아침 녘. 새소리는 투명하여 새소리 저편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나는 이 아침 햇살과 어울리는 투명한 한편의 시를 고르느라 벌써부터 탁하게 지쳐있다. 깊되 무겁지 않고 투명하되 가볍지 않고 막막하되 슬프지 않고 설레되 함부로 들뜨지 않는 저 가을 하늘 같은 시는 없을까?

주유소, 그렇지. 주유소가 있었구나.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이 가을을 위해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었구나. 항공우편봉투 귀퉁이처럼 만국기를 매달고, 내 욕망의 부피만큼 그리움과 설렘을 주유하여 주는 곳. 밤새 쓴 연애편지를 두근거리며 봉하던 그 새벽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시동을 걸고, 휘발성 강한 열정 속으로 나를 밀어넣게 하는 그곳. ...그러나 무수한 가을이 여름과 겨울 사이에서 그렇게 오고 갔듯이, 지상에서 가장 먼곳을 향해 주유천하(周遊天下)를 꿈꾸던 가을의 설레는 여로는 주유소와 주유소 그 사이에 존재했었지. 세상의 모든 차가 달려가는 마지막 귀착지는 결국 주유소가 아니던가.  - 김남호 (문학평론가)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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