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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노트] 실종

2003.04.29 21:57

윤성택 조회 수:506 추천:7

■ 시작노트

* 참고문헌
『노마디즘 Ⅰ, Ⅱ』/ 이진경/ 휴머니스트
『요재지이 1 ∼ 6』/포송령 지음, 김혜경 옮김/ 민음사




                                    실종

                                                        

  줄곧 나는 문학적 탈주, 정신의 빨치산을 경험하는 노마디즘을 통해 詩 영역의 새로운 발견을 꿈꿔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모든 개념들이 詩의 틀 안에서 짜 맞춰졌고 그렇게 사유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문득, 들뢰즈가 말한 '되기'에서  '실종자 되기'라는 모티브를 얻었다. 그리고 '요재지이'의 온갖 귀신과 정령들을 통해 내가 써야할 詩속 인물의 시점을 정리했다. 결국 나는 노마디즘적 '실종자'와 요재지이적 '귀신'이라는 두 테마를 '실종'이란 제목의 詩로 묶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대구 지하철 사고가 일어난 지 석 달이 되어간다. 처음 대구 지하철 뉴스를 보면서 참사 가족들의 슬픔에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뉴스가 계속되는 며칠 간 어김없이 그랬다. 그 중, 현장 CCTV 녹화 화면에서 실종자를 찾으려는 가족들의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다. 실종이란 말 그대로 소재나 행방,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지하철 안이 고열로 모두 녹아버린 실상에서 그 녹화화면은 절박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어둑한 화면 구석, 詩에 등장하는 한 사내가 있다. 사내는 영화 '메멘토'에 나오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 레너드처럼, 녹화테입 15분 분량의 기억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재생반복 될 때는 기억은 없어지고, 마치 전생처럼 새롭지만 낯익은 분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시가 시작되는 도입부는 테입이 빠르게 되돌려 재생되는 화면 속 장면으로 설정했다.

        뒷걸음으로 지하철 의자에 앉는다
        지나는 낯빛에서 이끌려오는 윤곽이 흐릿하다


  시의 구성에서 있어 나는 철저하게 노마디즘 10장 '생성 혹은 되기'의 관점에서 풀어내 보기로 작정했다. 그 사내의 일생 즉, 테입 속 사내가 되어 풍경을 해석한다면 암시와 은유로 수없이 되돌려보는 화면의 애잔함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억'이라는 나름대로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 정리를 '되기와 기억들'에서 발췌해 보았다. '끝없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가? 문제는 기억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또는 기억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 새로운 사실조차 이전의 기억 속에 다시 집어넣는가, 아니면 기억된 것을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하고 변형시키는가라는 문제. 기억된 것에서 탈영화화될 때에야 비로소 기억된 사실의 이용(재영토화)이 가능하다!'라는 것. 다시 말해 '15분'이라는 시간을 새로운 배치로 일생화(一生化) 시키는 변형, 탈영토화의 시도로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큰 틀에서의 주안점은 화면을 살피고 있는 실종자 가족의 의식 개입을 암시로 남기자는 것. 사내는 누군가 들여다보는 절박함으로 인해 시 중간쯤 '누군가 애달프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되기'가 '꿈이나 상상 또는 환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현실적이다'라는 내재성의 철학에 바탕을 둔다면 좀더 현실적인 코드를 들여 와야했다.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만
        번번이 전송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전생 어딘가 마주친 것 같은 사람들,
        지상의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고 있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은 실지로 실종 이전 누군가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화면 밖 현실에서는 그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죽음 이전의 존재이다. 그가 실존하는 화면의 문자메시지는 죽음 경계에서 보낸 것이며 이곳 삶의 영역에는 '번번이 전송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역시 15분 전 만났던 이들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전생의 사람처럼 아득한 기억이다. 여하간 현실의 코드는 '전송'의 문제로 암시된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내가 자신에게 던지는 이 질문. 이 질문을 '지각 불가능하게 - 되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말해 '가장 탁월한 잠행은 사람들 속에 사는 것이며, 모든-사람이-되는-것이다. 모든 사람처럼 존재하는 것.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잠행자 되기의 완벽한 극한이'라는 것. 즉 사내의 지각으로 판단되는 극한의 지점에 서서, 감응(affect)의 촉발을 가져보자는 설정이다. 자신이 귀신일수도 있는 것처럼.

        일기장, 편지, 메모들은 건너편 붉은 소화전 속
        비닐에 싸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써놓고 보니 10장 '생성 혹은 되기' 비밀의 세 유형 중 '형식으로서의 비밀'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일기장, 편지, 메모'는 결국 답이 나와 있는 참사를 암시하는 소도구가 된다. 즉 '변주되는 비밀의 형식은 내용과 무관한 변주에 불과한 형식의 것이 되는 것'이다. 화재 지하철에서 발견된 일기장, 편지, 메모를 유류품으로 비닐에 싸 전시하는 것이나, 화재 이전 소화전 속에 넣어두는 것이나 어디에서나 똑같은 사실의 결론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가끔 어느 낯선 곳에 처음 갔을 때 그 곳 풍경이 마치 언제 한번 와본 적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사내는 그 묘한 기분에 직감적인 불안을 느낀다. 그것은 15분이라는 일생을 가진 테입 속 사내의 생각일 수도 있고, 과거 실종되기 이전에 사내가 가졌던 생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지각불가능한' 되기의 지대 즉 분자적 구도에 걸쳐진 두려운 직감이라는 것이다.

        서늘한 터널 위에서 내려다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녹화 테이프가 수없이 되돌려 재생되고 있는
        CCTV 안,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죽은 사내의 시선에 초점을 두었다. '서늘한 터널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는 자신의 시신 한 조각이라도 찾아지길 희망하는 귀신일 수도 있고, 또다시 실종 이전을 비추는 CCTV의 화면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몇 개로 분열된 사내의 새로운 계열화를 통해 '실종자 되기'의 관계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야말로 사내의 욕망이나 의지인 것이며 이로 인해 끝없는 '실종자 되기'의 다양한 리좀적 접속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다시 뒤로 되돌려 재생되고 있는 테입은 어쩌면, 평균연령 70세로 요약된 우리 삶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실  종


        뒷걸음으로 지하철 의자에 앉는다
        지나는 낯빛에서 이끌려오는 윤곽이 흐릿하다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만
        번번이 전송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전생 어딘가 마주친 것 같은 사람들,
        지상의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고 있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두운 터널과 터널 사이
        그 빈 공간까지 바람이 날리고
        상여같이 환한 전철이 들어온다
        발걸음이 예서제서 쏟아졌으나
        좀처럼 타고 싶지 않다
        여기가 세상을 가둔 종점이던가,
        출입문이 덜컹 닫히자
        둥근 고리들 차례차례 허공에
        제 몸을 증거처럼 끼워 넣는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플랫폼을 거닐다가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다가
        어둑한 구석에 다시 앉는다
        누군가 애달프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일기장, 편지, 메모들은 건너편 붉은 소화전 속
        비닐에 싸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도무지 판독할 수 없는,
        적막을 향해 검은 레일이 지나고 있다

        서늘한 터널 위에서 내려다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녹화 테이프가 수없이 되돌려 재생되고 있는
        CCTV 안, 나는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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