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를 위하여

2003.10.25 15:48

윤성택 조회 수:613 추천:9


그랬던 것 같다
지하 호프에서
시인들이 종합선물세트 마냥
즐비했던 그 자리에서
굳이 명함 뒷면에
전화번호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잃어버렸다

자해공갈단 같은 가을,
詩가 얼마나 따뜻한 거냐
왜 그걸 잊고 사느냐
정말 詩를 믿고 있는 녀석이냐
다그치고 다그치고 나서야
나는 쓸데없는 분노를 잊었다,
버려 버렸다

그러다 오늘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기약도 없이 아득해질 것 같은 이름을
주화처럼 인터넷에 밀어 넣었을 때
이런 글이
내 기억의 주입구로 굴러 나왔다

그에게 비워둘 시간이 많다

----------------------
** 아래 산문은 박모 시인의 글입니다.

그것은 눈물이었을까? 그래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어둠 속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릴 뿐 내게 아무도 없던 날. 목마름으로 가슴 쥐어뜯을 그리움도, 미치도록 뜨겁게 끓어오르던 울분도 없던 날들. 그런 중에도 떨리는 아버지의 숟가락 사이를 빠져 나와 조금씩 조금씩 어둔 곳으로 흘러 들던 모래알 같은 시간들. 저녁 하늘에 의좋게 떠 있는 개밥바라기와 초승달 사이에 걸린 씻부신 듯 반짝이는 시간들. 나는 오랫동안 닿을 수 없는 저 시간들 사이에 걸려 있었다.

오후 내내 시장을 돌아 다녔다. 시든 시금치단을 떨이로 넘기기 위해 마지막 목청을 돋우는 야채장수 아주머니,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더 커져야 땅거미가 내리는지. 리어카 가득 생선을 싣고 나온 아저씨, 그 좌판 위에 얼마나 많은 고등어와 꽁치의 눈 시린 대가리들이 쌓여야 저녁이 오는지, 주차요금 오백원을 받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어 오는 할아버지, 그의 비척거리는 발걸음이 얼마나 더 빨라져야 따뜻한 밤이 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갈곳 없는 노인들이 비둘기 떼처럼 모여 앉아 윷판을 벌이는 한낮의 공원 귀퉁이.  언제나 정문에서 먼 쪽으로 자리를 잡던 구부정한 허리들. 주머니 속에 있는 몇 개의 꽁초를 만지작 거리며 줄어들지 않는 배식줄 틈에 끼어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시린 손 녹여줄 저 주머니마저 없었다면...

나는 지금 그들이 기다리는 한 국자의 국물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보다도 따뜻하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의 시는 헐렁한 젓가락질로 시린 겨울의 허기를 채운 그들이 짧은 저녁햇살을 등지고 돌아설 때, 간혹 하루종일 만지작거려 따뜻해진 주머니 속 두 개의 호두알처럼 외로운 사람들의 삶 그 언저리에서 달그락거리고 싶은 거다.

흐르는 물은 길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물줄기의 흐름이 이미 길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나아가며 슬픔과 소외를 바라볼 줄 아는 웅숭깊은 시선을 키워가야겠다. 연민이 아닌 사랑으로 슬픔을 위로하는 울림이 있는 시를 위하여.




2002.10.12.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67 나였던 기억 2004.01.07 916
66 크리스마스 이브, [1] 2003.12.24 529
65 편지 [1] 2003.12.11 847
64 대학원, 2003.12.09 773
63 신춘문예의 계절 2003.11.27 639
62 어느 시인의 죽음 2003.11.20 571
» 시를 위하여 2003.10.25 613
60 귤로 물들다 2003.10.13 385
59 가을 단상 [1] 2003.10.01 485
58 김솔에게 - 너의 만연체가 말해 주는 것 [1] 2003.08.26 513
57 늦은 아침 2003.07.30 530
56 두근두근 소곤소곤 2003.07.21 423
55 '오노 요코'전을 보고 [2] 2003.07.08 337
54 견딜만 하다 2003.06.24 639
53 나는 지금, 2003.06.17 473
52 선생님을 돌려주세요 2003.05.16 372
51 [詩作노트] 실종 2003.04.29 506
50 그런 날 2003.04.29 431
49 박성우 [거미] (창작과비평사) 시집 읽기 2003.04.08 437
48 소리 지른 사람은 저입니다 2003.04.02 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