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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하루키를 떠올리다

2001.06.12 15:30

윤성택 조회 수:501 추천:4





겨울이었다.
유리창은 밤과 낮으로
성에꽃을 피우다가 지다가
눈물 흘리기 일쑤였고,
나는 정오 이전에 일어난 적이 없는
철없는 대학생이었다.


아팠었다.
작은 내 방에서
고치를 만들어
변태를 꿈꾸는 번데기처럼
나는 그렇게
형광등 불빛으로
희멀건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계절처럼 왔다가 떠났던
나를 스쳐간 여자가
아슴아슴
귀를 후빌 때마다
떠올랐다.


"1973년의 핀볼"
이었다.
형이 한 여자와 혼인서약을 하고
떠날 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아무렇게나 쌓여진 책더미
맨 위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


내 유년의 뿌리였던
우리집은
기차역 부근이었다.
나오코가 말하던
플랫폼 근처처럼
개가 산책을 나올 정도였지만
이내 도살장으로
팔려 갈 뿐이었다.


나는
책이 손끝에 감겨오자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쥐"처럼
무력감에 벗어나려
발버둥쳤는지도 모른다.


하루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읽히고 만 것이었다.


좁은 어둠속
접혀졌던 활자들이
내 눈을 통해 내 심장으로
꾸역꾸역 흘러 넘쳐 왔다.


몇 년 후 나도
그렇게
208, 209처럼
떠나 왔다.


지금,
핀볼대의 발견에서처럼
이유 없는 나의
상실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키는 나에게
그렇게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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