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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오너라 인간아 - 영화 "AI"를 보고

2002.04.19 15:07

윤성택 조회 수:257 추천:2


“오너라, 인간의 아이야.
물을 지나 황야를 건너,
요정의 손을 잡고,
세상은 네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울음으로 가득하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요즘은 날이 선선해서
빤쭈만 입고 자다가도
새벽녘에는 발가락으로
이불 끌어다 덮고 옹송그려야합니다.
또 낮에 차 안에서도
닫힌 차창을 열고
시원스레 가르마를  세워주는
바람을 느끼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고요.
가로수들도 슬슬 낙엽에게
낙법을 가르칠 때가 된 듯
해지는 밤마다
나이테를 되짚어 볼 것입니다.
이런 날은 박정만 시인 말대로
"슬픈일만 나에게" 읊조리며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서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정처(定處)를 정해다오.
라고 가을 타고 싶기도 합니다.
일조량에 의한 계절성 우울증.
"가을 탄다"의 의학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 가을을 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간지럼을 태우듯
가을에게 간지럼을 타는 것이
가을 탄다라고 믿고 싶습니다.
세상살이가 짐 가득 실은 이삿짐센타차의
화물칸 같은 거라고
덜컹덜컹 실려 가는
그런 것이 세월이며 인생이 아니겠냐고
그러다 늦은 밤 성냥을 켤 때
손으로 바람 막아오는 누군가가
인연의 그 사람 아니겠냐고,
그래서 배달되는 곳이
죽음 저편이 아니겠냐고,
태어나고 죽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다가
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슬러올라가
애초에 내가 하나의 유전자이었을 시절,
내 운명의 게놈이 위치 해놓은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믿어도 될른지.
생물시간 플라스크에 미생물 넣어놓고
관찰하는 것처럼
지구도 하나의 플라스크인 셈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 인연이며
운명이며 내세우며
삶의 화학반응을 지켜보는 神이야 말로
가당찮은 호기심에 의한
창조가 아니었을까.
광섬유보다 질긴 인연을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반응을 통해
나의 게놈에 회칠갑을 해야할까.
언제부터인가
눈물이야말로 이 지구상의 실험의
역반응이라고,
더 이상 울지 않겠노라고
기독교의 은혜를 받는 것이든
불교의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든
도교의 득도의 깨달음이든
그거 다 못장 울지 않기 위해
인간이 만든 편법이라고
믿어버리면 그만 아닐까.
끝없이 길고, 넓은 우주 안에서
창해의 좁쌀 한 알도 못되는
이 몸이 하루살이처럼 짧은 목숨을 가지고
그래도 무엇을 해보겠다고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앙증거리는 일.

이 가을에 느끼는 간지럼.
그래도 이 훌륭한 다트판.

A.I의 데이빗처럼
"이거 게임 하는 건가요?"
묻고 싶은.


200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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