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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번지점프를 하다

2002.04.20 11:20

윤성택 조회 수:400 추천:6




내일은 예비군 훈련이 하루 있는 날입니다.
간만에 아침 일찍,
도심을 벗어나 금곡으로 향하겠네요.
장마전선이 남쪽 어디쯤에서
산맥을 핥으며 올라오고 있음을 직감한 것일까요.
내일은 반드시 비가 온다고
처마 밑에서 시집이나 읽으라고
창밖 나무들이 바람에 수런댑니다.
군복은 제대할 적 내 몸을 기억하고 있는데,
저는 자꾸만 나이테를 두른 것만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육군병장 겨울,
동덕여대 국문과 30번과 펜팔을 하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린다, 믿었드랬습니다.
군우체국 사서함을 기웃거릴 때마다
솔솔히 배여 나오던 편지지에 스민 꽃향내,
군복 건빵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아무도 없는 야간 근무 때
읽고 또 읽었던 설레임.
이제는 그 느낌도 그날 밤 암구호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말년 휴가 때 비로소 만난 펜팔의 그녀는
"애인이 있어요."라고 말했지요.
그리고는 자대 복귀할 때
굳이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쫓아와
에리히 프롬 "소유와 존재"책과
두툼한 초콜릿과 순대 한아름을 안겨 태웠습니다.
그 고집스러움에 나는 그만,
전방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울뻔 했었습니다.
제대할 때 그녀의 편지가 내가 군생활에서
받았던 편지의 대부분이었음을 알았을 때
문득 어쩌면 그녀는
제대후 내가 연락해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그녀는 졸업을 하여
행방을 알 수 없었고,
나는 다시 철없는 복학생이 되었습니다.
아, 이론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나요?


그 후의 이야기는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했듯이
"첫눈에 반하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말하는 것이다"를
굳게 믿었던 서인우가 되어,
퍼붓는 소나기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갈 때
갑자기 작은 우산 안으로 한 여자가 살며시 들어와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만 씌워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인태희가 되었다고 상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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