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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레지를 사랑하다

2001.04.04 17:21

윤성택 조회 수:410 추천:12


국민학교(나는 초등학교를 나온 적이 없다)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 집 근처에는 허름한 영화관이 있었다.
나는 그 영화관 서툰 그림간판이 바뀔 적마다
철조망 쳐져 있는 쪽문으로 몰래 숨어들어
객석 뒤편에서 "정윤희"의 알몸을 훔쳐보았었다.
그때 나는 나이가 들면 영화 속 세상처럼
멋진 인생이 있을 거라고 환상을 키우며
삶을 키재기 했었다.
그 후 나의 뼈가 살 속에서 아프지 않게 자랐고,
몇 번의 절망과 몇 번의 사랑이
숨막히게 다가 왔었다.
가끔은 현실로부터 유예된 꿈에 대해
몇 병의 소주와 담판을 벌일 때도 있었는데
대부분 변기에게 실토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도 했다.
아마 그때 나는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행여 만나게 되더라도
멋적은 미소로 그 안의 부재를 둘러대고 헤어졌을 것이다.
지독히 홀로서기에 옹립했던 그 스무 살 무렵,
겨울 동면冬眠 같은 대인기피증이 버즘처럼 자랐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그때 나는 왜 다방 레지를 사랑했는지,
아슴아슴 뽕짝의 완행버스를 타고
왜 그녀가 팔려간 곳까지 찾아갔었는지
그녀의 짙은 마스카라를 타고 흐르는
검은 슬픔을 왜 문신처럼 마음에 새기고 돌아왔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청춘을 적당히 탕진한 이 끝없는 추억들,
어쩌면 어릴 적 그 영화관
잠시 보았던 신파를 각본없이 흉내낸 것일까.
이렇게 흐린 날은
마음의 뿌리에서 생각을 길어 올리며
봄꽃처럼 무언가를 피워 낼 수 있다고,
너로 인한 모든 길은
결국 나를 나이게 하는
에움길이었다고
자꾸만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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