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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꿈길을 돌아/ 이창호 / 동길사



[해설] 자연과 소시민에 대한 고찰
        




                                                                윤성택



시인은 일상사를 재해석해 내는 더듬이를 가진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눈은 일상과 나를 동시에 바라보는 가운데 삶의 깊이를 투영해낸다. 그렇다고 그런 눈이 지극히 주관화되어 세계를 사적 인식의 틀로 가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접근하는 시인의 눈은, 진정으로 세상에 대한 본질을 순수한 감성으로 이끌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해야한다는 말처럼, 시가 우리 인간진화의 질적인 면을 담당해 왔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번잡한 저잣거리의 수많은 서적들 중에서도 시집 한 권을 펼쳐 보더라도 그 자체가 진솔한 영혼의 소산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시집 해설을 맡아 달라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적잖이 당황했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이런 해설을 맡기에는 여물지 못한 나의 필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소 그의 시를 자주 접했었고, 평을 하던 것에서 조금 길게 쓰듯 편하게 써달라는 말에 끝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창호 시인은 여러 문학 사이트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는 분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시집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빈터"의 동인이면서 "시현실 신인문학상" 수상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의 행보가 어디까지 이를지 사뭇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그의 다양한 시 속에서 향일된 정신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함께 아우르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고찰이지 않을까 싶다.
자연은 각박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깨달음이자 존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스승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옛 것의 전통을 자연과 융화시켜 되살려 내는 그의 솜씨는 "가야금 병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옷고름 풀고 눕는 음률의 살결은
얼마나 보드라운가


사내만을 위하여 살진 가슴살을 달궈온
아녀자의 살 타는 냄새가
화르르 달아오르는 신방(新房)에
새소리,
물소리,
사람소리,
알몸으로 섞인다.

둥근 달빛 아래, 느린 곡조로 허리가
움직이고 별빛들,
문풍지를 뚫고 살짝 엿본다.

탱탱하게 흥분한 음계(音階)를 밟고

날밤이 산조산조(散調散調) 익는다

                        ― 「가야금 병주」


가야금을 에로틱하게 그려낸 이 시는 한 행 한 행 의미들이 넘실거린다. 지금껏 악기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 시들은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몸으로 육화肉化된 시의 흐름은 보기 드문 수작으로 읽힌다. 산조散調란, 느린 속도의 진양조장단으로 시작하여 차차 급한 중모리장단·자진모리장단·휘모리장단으로 바뀌어 끝나는 것을 말한다. "탱탱하게 흥분한 음계(音階)를 밟고/ 첫/ 날밤이 산조산조(散調散調) 익는다" 말미의 처리가 참신한 것은 "산조"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운율감에서 비롯된다. 또 악기란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이 시는 연주자보다는 연주 그 자체의 흐름에 온 시상을 내 맡긴 것에 의해 더욱 돋보인다. 이러한 시적 흐름은 달밤과 첫날밤을 통해 생명 탄생의 근원을 되묻게 한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과의 융화를 방해하는 것은 "문명"이 되기도 하는데, 자연을 훼손하는 물질문명의 병폐도 꼬집는 "갓바위에서 2"가 그 예이다.

                                

팔공에 올라 정상의 마지막 암벽을 열면,
극락이 있다. 소문이 들리자 사람들 몰려
至誠드리는 갓바위에는 그러나 感天이 없다.
있더라도 조금만 있다.
돌부처 근엄하게 앉은 돌 안에는 소원이 없다.
돌의 나이테만이 있을 뿐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녀가셨나
풀 한 포기 없는 정상에 멍석처럼 아니
지폐처럼 미끈하게 대리석바닥이 깔리고
그 위에 앉은 돌 하나 돈 같은 시선으로
산아래 마을 굽어본다. 밤새 손을 비비던 나무들이
해탈하는 계곡의 아랫목, 눈 녹아 흐르는
시냇물이 낮게 엎드려 졸졸졸 법구경을 왼다.
山寺, 햇살 사뿐히 내리고, 대웅전 지붕 위에서
不信不信 새순이 돋는다. 그러나 갓바위
돌에는 새순이 없다. 돌 위에 둥지를 틀고
삼백예순날 집 짓고 소원을 빌었다던, 새도
하늘도 가슴에는 새순이 없다.
자꾸만 돌아눕는 갓바위 돌덩이, 돈맛 들여,
다시 돌아서는 立春節,
봄은 아직도 入山禁止.    

갓 쓰고, 나도 저 돌처럼 팔공에 박히면 돌
부처라도 될까. 헛튼 생각 말라며 하늘이
뭉게뭉게 꾸짖는 산정에는
백팔 구비 산들이 경계를 긋는다.
경계를 하나씩 부수며 시신경이 머무는 자리,
한 계단 밟듯 성큼 올라온 바람이
귀밑머리에서 지저귄다. 속지 마라 속지 마라
돈으로 지은 돌, 돌로 망한다.

                                ― 「갓바위에서 2」



이 시는 "갓바위"라는 시적 상관물을 통해 물질문명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인 시음詩音이 다소 고음에 위치한 듯 보이지만, 뚜렷한 서정성의 확보가 된 부분으로 인하여 시의 진폭이 깊다. "밤새 손을 비비던 나무들이/ 해탈하는 계곡의 아랫목, 눈 녹아 흐르는/ 시냇물이 낮게 엎드려 졸졸졸 법구경을 왼다./ 山寺, 햇살 사뿐히 내리고, 대웅전 지붕 위에서/ 不信不信 새순이 돋는다"의 절묘한 흐름은 그의 시가 얼마큼 서정의 깊이를 다루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세속적인 물질문명은 이처럼 자연의 훼손과 아울러 정신적 병폐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그의 시는, 아무도 닿지 않는 "무인도"에까지 이른다.

                                

우리
굳이 가보지 않았어도 수평선 어디쯤
작은 섬이 한두 개쯤
있음을 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빈 여백에 떠서
어떤 질료와 색채에도 동화되지 않은,
그러면서도
온갖 짐승들의 고향이 될 수 있었던,

바다조차도
제 스스로 몸을 떠밀고 와서
작은 암초에 생살을 묶는,

하늘조차도 감히
이름을 지을 수 없어
지금껏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던,

하늘과
바다와
인간의
중간에 놓인




                        ― 「무인도(無人島)」


문명조차 닿지 않은 무인도에서는 문명의 "어떤 질료와 색채에도 동화되지 않"고 단지 "온갖 짐승들의 고향"으로 인식된다는 발상은 그의 사유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 시는 사물의 명명성에 관해 심도 있는 관찰이 돋보이며, 또 거기서 오는 서정성까지 두루 보여주고 있다. 제목에서 주는 이미지의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바다조차도/ 제 스스로 몸을 떠밀고 와서/ 작은 암초에 생살을 묶는,"과 같은 표현은 절창에 해당된다. "하늘과/ 바다와/ 인간의/ 중간에 놓인// 섬"에서처럼 결국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사람과 자연의 합일된 어느 지점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런 그는 결국 거대 도시문명에서 무인도처럼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모색한다.
    

                                
거리에서는 나무,
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짙은 잎새마다 터지는 빛살무늬
한번도 벗어나 본적 없는 창가에 매달린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삼킨다.
새의 발아래 세상이 깔려있었다.
그 세상에 인간이 산다.
인간에게 밟힌 내가 있다.
내 발 밑에서 아내가 바둥거린다.


                        ― 「가난한 신혼일기 2」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처연함이 묻어나는 이 시는, 각박한 문명 속에서 먹고 먹히는 일상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선보인다. 가난한 신혼인 화자가 밝히는 "내 발 밑에서 아내가 바둥거린다" 부분은 내조를 해야하는 아내조차 삶에 허덕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시에서 "새"의 이미지는 거대화되고 조직화된 문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며, 그 "새"가 삼킨 하늘은 그 아래 "인간"들이 소시민으로 기생할 수밖에 없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화자에게는 도시에 내리는 "비"조차 귀기울일 수 없는 고단한 삶의 편린으로 작용한다.


                                
방안에서 나는 무엇에게도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뉴스도 듣지 못했다.
간간이 귀뚜라미 보일러 통이 덜커덩 숨쉬는 소리
24시의 밤을 집요하게 짚어대는 벽시계의 심장 뛰는 소리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어둠이 한 방울씩 떨어져
집안이 침식당하고 있을 뿐
창을 타고 흐르는 비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다.
형광등 불씨가 내 이마 위에서 활활 타오른다.
장롱 속에는 진열된 내 여벌의 목숨,
내가 잠들고 나면 어떤 영혼이 내 밤을 새 단장할까.

비가 되고 싶다.
내 몸이 송두리째 이 밤의 외벽을 타고
액체로 흘러내기를,
깨어있는 불빛과
불빛 아래 발광(發光)하는 사물과
모든 존재에 반짝이고 있을 물방울들에게
빈다.

                ― 「비」


왜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 화자는 "보일러 통이 덜커덩 숨쉬는 소리"나 "벽시계의 심장 뛰는 소리"에 민감할 뿐 도통 자연과의 소통을 못한 채, 오직 그의 청각을 자극하는"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어둠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것에 민감해 한다. 결국 화자가 그리는 물방울은 바로 "비"에 대한 아련함이며, "내가 잠들고 나면 어떤 영혼이 내 밤을 새 단장할까"라는 바램으로 자연에 대한 존재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의 장점은 견고한 비유에 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도입부부터 시선을 한껏 흡입시키는 것이 인상적이다. 또 "조간 신문 경제면을 읽다가"는 화자가 직접 개입되는 실업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침에
현관문을 두드리기에 누군가 나가보니 조간신문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다 들어오세요.
내가 인도하는 테이블로 가 앉은 겹겹의 인쇄물들,
오늘은 또 어떤 활자들로 나를 긴장시킬까
신문을 펼쳐들자 납덩이같은 메시지들이
허리 꺾인 노숙자처럼 내 안구로 걸어 들어왔다.
새벽 무렵 내 머리맡에서 삶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던 햇살이
지금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상승 지수로 돌아설 것 같았던
심장박동이 또다시 경제면에서 덜커덕 내려앉았다.
이야기를 끝내면서 창을 열어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이 자꾸만 내 발 밑에서 돌아눕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가 자꾸만 내 얼굴 위에서
눈물 자국을 끓여대고 있었다 돌아서는 조간신문의
어깨쯤에서 오늘 하루가 비틀거렸다.

                                
                        ― 「조간 신문 경제면을 읽다가」


시대의식을 강하게 반영한 이 시는 신문과 소통하는 설정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또 대상을 의인화하여 주객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신문을 펼쳐들자 납덩이같은 메시지들이/ 허리 꺾인 노숙자처럼 내 안구로 걸어 들어왔다"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 부분으로 말미암아 실업자들이 경제면을 읽다가 고개를 꺾는 모습이 절묘하게 표현된다.
좋은 시는 항상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하나의 세상에 대한 이면을 보여준다. 이창호 시인의 시편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자연에 대한 귀의본능과 어머니, 그리고 소시민의 삶들에 대한 조명이 촘촘하게 배여 있다. 이러한 사유의 근저에는 각박한 삶 속에서도 시적 포즈가 세계와의 길항관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에 생각의 강을 잇대고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안에서 길러지는 언어들은 이제 유선형의 눈부신 지느러미를 가지고 세상에 읽힌다. 마치 갓 잡아 올려 살이 오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힘과 의미의 입질이 풍부하다. 이제 남은 일은 더 큰 물 속으로 나아가 어둠과 맞서며 강렬한 태양과 맞서며, 문학의 연원에 가 닿는 것. 이창호 시인이 나아갈 지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