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맑은 날 - 김선우

2001.04.18 12:06

윤성택 조회 수:2227 추천:284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선우 / 창작과비평사 2001






맑은 날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웅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꺾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감상]
굳이 두 개의 시를 연달아 '좋은시'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적잖이 놀란 것은 버려진 장롱를 꿰뚫는 시선에서였습니다.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의 부분이 그러한데, 낡은 장롱의 현존에서 그 근원까지 쫓아 올라가는 상상력이 좋습니다. 이 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맑은날"이라는 정서와 장롱과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돌팔매질당할 사랑"이라든가 "죽기 좋은 맑은 날"이라는 일탈의 충동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오늘 같이 맑은 날 말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9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