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모기 선(禪)에 빠지다 - 손택수

2002.07.26 13:15

윤성택 조회 수:1041 추천:187

모기 선(禪)에 빠지다/ 손택수/ 제3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모기 선(禪)에 빠지다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
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
아리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
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
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꺼트릴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
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
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감상]
모기에 대한 사색이 인상적이네요.  읽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아마도 이 시인의 입담에 있지 않을까 싶군요. 일상의 모기를 통해 선禪에 도달하려는 시적 방향도 새롭고요. 결국 찬바람이 드는 무렵 사라질 모기이지만 여름 내내  수도의 자세를 요구했다는  데에 더 의미가 있을까요. 어쩌다 그들과 피를 나눠야 하는 숙명이 되었을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木도장 - 손택수 2001.06.01 1536 350
119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0 337
1189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188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87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7 332
1186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85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184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
1183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8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1181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80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 함민복 2001.05.17 1380 324
1179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7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76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75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74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2 319
1173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72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