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앞의 전선』 / 이향지 /『천년의 시작』시인선 (신간)
뚜껑이 덮인 우물
고궁 뒤뜰
왕비가 앉았다 떠난 툇마루에 앉아
변절한 애인을 생각할 때
뚜껑이 덮인 우물 하나 마주 앉는다
아무도 떠먹지 않는 물이나 넘실넘실 끌어안고
왕비전 뒤뜰에서 늙어버린 여자
하늘색 나무 뚜껑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래된 돌담을 두르고 마주 앉는다
젖가슴 아래까지 차 오른 물이
그림자일망정 왕을 담았기에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여자
내가 잠시 허리를 굽혀 열어준다 해도
스스로 몸을 기우려 엎질러 질 수도 없는 여자
세상의 표면으로 길을 내어 소리쳐 흐를 수도 없는 여자
어떤 왕이 이 그늘진 뒤뜰까지 와서
저 깊은 가슴에 맞는 두레박을 내려줄 것인가
반항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고
모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여자
뚜껑을 들추면 오늘의 하늘을 담을 수밖에
나는 건너간다
뚜껑 아래 여자에게 오늘의 하늘을 보여주려고
여자 속의 왕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버리려고
발등까지 덮이는 하이힐을 신고 감색바지를 입고
다가가는 고통과 다가오는 고통 사이에서
듣는 발소리
들어올리려는 힘과 누르는 힘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악취와 암흑
뚜껑 아래 우물은 썩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썩고 있는 여자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
악취로 대답하는 여자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여자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
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른다
[감상]
고궁 뒤뜰에서 발견한 뚜껑 덮인 우물에서 시작된 시는 상상력의 결이 진솔하고 진정성이 돋보입니다. 초반부 우물의 내력과 후반부 시대를 반영하는 표현은 사뭇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마흔 일곱 살에 데뷔하여 예순 살을 넘긴 시인은 이렇듯 깊이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보여줍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치열함을 젊음의 소산으로 보았던 그간의 생각이 누추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을 통해 잊고 지냈던 그리움이나 희망을 되찾았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