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움직이는 별 - 박후기

2003.12.04 11:28

윤성택 조회 수:1598 추천:238

「움직이는 별」/ 박후기 / 창작과비평 2003년 겨울호


        움직이는 별
        
        이삿짐을 꾸린다
        좀더 넓은 집을 원했으므로,
        나는 차갑고 어두운
        우주 저편의 저밀도 지대를 향해
        짐 실은 트럭을 몰고 간다
        도시가 팽창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불러오는 풍선의 표면에 들러붙은 티끌처럼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변두리의 버스 종점이 市 경계를 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듯
        젖은 눈망울 반짝이는 어린것들을 이끌고
        더욱 깊숙한 어둠속으로
        나는 달려간다
        뒤돌아보면, 불 꺼진 내가 살던 집
        눈 감은 창문이여 안녕
        나는 이제 더이상
        처절한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잠든 네 몸을 흔들어 깨울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호롱을 떠난 불빛과 같고
        다만, 검은 그을음 같은 구름만이
        뒤돌아보는 별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가린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멀어져가는 별들의 뒷모습처럼
        보일 듯 말 듯 위태롭게 빛날 지라도

        
[감상]
살아가면서 세간의 짐이 하나씩 늘고, 또 아이가 생기고 하다보면 좀더 큰 공간을 위해서 외곽으로의 이사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심경을 잔잔한 우주적 상상력으로 비유해냅니다. 도시를 우주의 팽창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인만의 직관인 셈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우주의 끝자락 어딘가로 이동하다보면 간간이 보이는 항성들이 저녁불빛을 내건 이웃이란 사실. 다시 우주의 중심으로, 도심으로 갈 수 있을지 약속 할 순 없지만 세월 내내 촘촘히 박힐 통장 속 숫자처럼 아득할지도 모릅니다. 눈감은 창문이여 안녕, 덜컹덜컹 짐 실은 트럭이 우주 밖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네 삶 하나하나가 어떤 궤도 위에 놓여진 것만 같습니다. 이 시대에 서정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시인이 몇이나 될까 싶다가도, 이 시에게서 안도를 느끼는 건 왜일까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90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