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안녕 - 박상순

2007.06.20 18:12

윤성택 조회 수:1784 추천:139

<안녕>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안녕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살았다는 남자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미 죽은 그녀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미 죽은 나는 여자였을 지도 모른다고
        나도 잘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골목은 조금 어두웠지만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고
        아직 겨울바람이 남아있어서 어깨를 잠깐 움츠렸지만
        옷깃을 다시 여미며 나는
        사내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안녕”


[감상]
누가 살아 있고 죽은 것일까, 이 시를 읽다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묘한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죽음의 경계는 상식에 갇힌 판단일 뿐이며, 진정한 진실은 죽은자와 산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직관은 이러한 흐름에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의 반복적인 응시, <∼있었다> 시제로 삶과 죽음의 시공간을 담담하게 서술해냅니다. 1연과 3연이 거의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2연에 의해 3연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점도 이 시의 묘미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7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0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