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네 -조정

2007.08.10 10:50

윤성택 조회 수:1260 추천:129

「지네」 / 조 정 (2000년 『한국일보』로 등단) / 2007년 《시와사상》 여름호


        지네

        건드리면 아악
        울 것처럼 몸이 붉은 지네가
        기둥 밑으로 기어와 죽어 있었다

        뭘 봐 씨팔 년아
        독한 말에 걷어차여 발을 떼지 못한 채
        염천교 구두 골목 지나 벽제 가는 버스 뒤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세브란스 빌딩 앞 가로수 아래
        빗물은 컵라면에 차오르고 소주병 매끄런 어깨를 쓰다듬었다

        건물 틈틈이 기대어 그들은 비를 긋거나 볕을 피하는데
        그는 늘 가로수 아래 있었다
        불어서 녹는 신문지 같은
        그를 무릎에 안고
        길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눈 밑이 번들거리기만 했다

        먼지처럼 고요해진 그를 개미 떼가 떠메어 갔으나
        잠이 들면 그는 미약처럼
        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붉게 취한 그가 목을 물어뜯었다
        가임기 지난 월경이 요를 적셨다


[강인한 시인 감상]
* 오늘은 특별히 늘 열정적이신 강인한 선생님의 시읽기로 대신합니다. 달리 다른 감상을 덧붙일 필요없이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조 정 시인이 발표한 신작시입니다. 힘 있고 선이 굵은 시. 무섭고 끔찍한 거리의 어떤 풍경을 그린 시입니다. 여성 시인으로서 나는 일찍이 조 시인만큼 당차고 과감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 시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비 내리는 가로수 아래 비 맞은 신문지처럼 불어터진 한 부랑자 사내, 그의 까닭 없는, 세상을 향한 붉은 적의가 무섭게 느껴집니다. 첫 연과 끝 연은 실제의 지네, 중간은 지네를 닮은 사내 이야기입니다. 기승전결의 구성도 치밀합니다. 이 시는 특별히, 지네의 검붉은 색채 이미지가 소름끼치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둥 밑에 죽어 있는 몸이 붉은 지네, 붉게 취한 그, 요를 적신 가임기 지난 월경, 읽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빼어난 시입니다.

■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제5회 전남문학상 수상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등
다음카페 ‘푸른 시의 방’ 운영 (http://cafe.daum.net/poemory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木도장 - 손택수 2001.06.01 1536 350
119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0 337
1189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188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87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7 332
1186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85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184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
1183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8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1181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80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 함민복 2001.05.17 1380 324
1179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7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76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75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74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2 319
1173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72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