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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과자 - 최금진

2007.10.23 18:00

윤성택 조회 수:1200 추천:130

『새들의 역사』 / 최금진 (1997년 『강원일보』, 2001년 『창비』 신인상으로 등단) / 《창비》(2007)


        어떤 전과자

        수갑을 찬 수형의 어둠이 줄줄이 끌려오는 밤길
        그 중심엔 언제나 파출소가 둥둥 떠 있고
        눈송이들 떠다니는 골목에서
        나는 그를 기다린다

        중얼중얼 「레위기」를 읽으며 가로등이 지나가고
        새파랗게 머리를 삭발한 눈들은
        길에 닿자마자 더러워진다
        건달들의 삶이란
        모든 길을 지나 불켜진 파출소로 흘러오기 마련
        나는 파출소를 꺼내어 성호를 긋는다

        십자가와 모텔의 붉은 등만 묘비처럼 남은 도시에서
        부디 복수심이여, 자비를 베풀지 마시압!
        눈을 뜨거나 감아도 어둠은 그저 어둠인 이 밤길에서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자루에 맹세한다
        이 도시의 한 풍경에서 나는 그를 도려낼 것이다

        인적 없는 자정, 달조차 없는 빛의 사각지대
        찌익 긋는 성냥처럼 아주 조금만 견디면
        사그라지고 마는 밤
        더는 가벼워질 수 없어서 눈송이들 곤두박질치고
        밤의 무채색 위에 덧칠해진 제 그림자를 벗어
        외투처럼 흔들어대면서
        보라,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웃으며 온다

        온통 흰색뿐인 어둠을 덮어쓰고
        지워지는 눈송이들아, 잘가라
        다시는 이 길에서 헤매지 말자, 잘 가라

        나는
        그를
        찌를 것이다


[감상]
이 시를 압도하는 분위기는 살벌한(?) <적의(敵意)>입니다. 이 추동력이 이 시의 골간을 이루고 그곳에서 강력한 비유가 분출합니다. 매양 고상한 품새에만 신경 쓴, 의인화에서 식물성까지 두루 꿰차면서 허세부리는 포즈의 시가 아니지요. 최금진 시인의 시편들은 <나는/ 그를/ 찌를 것이다>의 강한 신념처럼 문학적 결의가 서려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악으로 구분하는 살인의 차원이 아닌, 문학적 진정성과 상통하는 치열함 같은 것입니다. 모호한 관념이나 환상과 타협하지 않고 이 시는 그야말로 현실에 올인하면서, 전과자 내면에 숨겨진 뜨거운 응어리를 기탄없이 쏟아냅니다. 남루한 현실에서 복수하듯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펜을 움켜쥐고 앉는다>는 시인의 말처럼, 운명과 접신한 한 권의 시집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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