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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지다 - 박지웅

2008.01.10 17:35

윤성택 조회 수:1408 추천:121

『너의 반은 꽃이다』 / 박지웅 (2004년 『시와사상』, 2005년 『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문학동네》 시인선


   길에 지다


   1

   이 길을 방류하는 것은 언덕의 집들이다

   섬마을 언덕에서 흘러내린 길은 모두 포구에서 만나 바다로 흘러든다. 언젠가 아이들은 이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게 되고 누구나 한 번은 오가게 되는, 이 언덕길은 이곳 섬들의 모천인 셈이다. 그러니 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섬을 나가는 것은 모두 연어일 뿐이다.


  2

  때가 되면 집들은 스스로 수문을 연다

  이 길의 냄새를 익힌 치어들의 지느러미에 힘이 붙고 그 흰 몸 달아오르는 달밤, 아이들은 하나둘 포구로 내려와 바다에 슬며시 몸을 눕힌다. 그렇게 달동네 같은 섬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섬이 펼치는 진(陣)은 진기하다. 길을 나선 이들 대부분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길이 가진 권능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몸속에 부풀어 오르는 집터의 냄새 때문이다. 그리움의 발진이 옆줄부터 붉게 감돌면 귀향이 시작된다. 여러 번의 겨울이 어망처럼 훑고 지나간 그때, 이미 반수 이상이 떨어져나갔다. 곳곳에 펼쳐진 삶의 진들을 지나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저들 또한 세상이 거두어간 일행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3

  길이 부를 때는 떠나야 한다

  거역으로 완성되는 삶은 없다. 섬이 부를 때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 가슴으로 문지르며 그 섬길을 올라야 한다. 가파른 입을 가진 상류에 이르면 신비로운 물의 악기를 만나게 된다. 그 관문을 통과하는 길은 하나, 길이 가진 낙수의 악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집터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오르면 오르는 대로 떨어져나가도, 산 채로 완성되는 생은 없으므로.


  4

  한 차례 긴 물의 연주는 끝나고

  나무토막처럼 흘러가는 몸들, 꽃잎처럼 흘러가는 영혼들, 길에 드는 것은 길에 진다는 것이다. 굽이진 물의 봉우리 다 넘어온 저들, 물과 땅의 경계를 흔들어 그 환한 알들, 섬 자궁에 포개어넣는다. 천천히 뒤집히며 길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상]  
섬마을에는 고즈넉한 가로등과 길이 있고 저녁 무렵 쓸쓸하게 담벼락을 훑는 바닷바람이 있습니다. 길은 최초의 발자국과 최후의 발자국이 시간의 축으로 이어진 하나의 흐름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도처로 나가 결국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오듯, 삶은 길 자체가 목적인 길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그 섬에 불었던 바람은 <신비로운 물의 악기>에서 들려오는 것이며 <그리움의 발진>은 성인이 돼서야 앓는 향수병일지도 모릅니다. 길에 관한 사유가 <섬>과 어우러지면서 알듯 모를듯 삶에 가닿고, 그 삶이 잉태하는 풍경은 여전히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환한 인가의 불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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