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헛새들 - 이사라

2008.03.14 17:55

윤성택 조회 수:1296 추천:132


『가족박물관』 / 이사라 (198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문학동네》 시인선 (2008)


        헛새들

        시간의 주름들
        햇살 깊은 나의 정원에서 나무늘보가 된다
        한없이 느리게
        시간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들 사이로
        불 켜진 모니터
        존재는 없고
        빈 폴더만 생성하는 무심한 오후
        어느 사이 검은 새들이 모니터를 뒤덮는다
        자판 위의 잡새들이 날아가
        모니터에 제대로 박히지도 못하고
        유성(流星)처럼 꾹꾹 운다
        내 손가락 끝에서
        온갖 헛새가 날아오른다

        기러기 까마귀 나무발발이 논병아리 동고비 말똥가리
        메추라기 부엉이 뻐꾸기
        그림자도 없는 새들
        새 곤줄박이 새 기러기 새 닭 새 말똥가리 지빠귀 직박구리
        그림자뿐인 새들

        검은 세상 속에서
        무심한 알을 품고 있다가 무심한 문자를 낳는
        내 모니터 속의 세상
        한없이 깊다
        갈 길은 멀고 모니터 속은 길다


[감상]
컴퓨터의 등장 이래로 모니터 속에는 광활한 '검은 세계'가 존재합니다. 인터넷은 텔레포트와 같습니다. 한쪽을 열면 동시에 아주 먼 공간이라도 다른 쪽 공간이 열립니다. '불 켜진 모니터/ 존재는 없고'란 이처럼 어딘지 모를 다른 포탈로 빨려 들어가는 '길'의 불확정성일 것입니다. 모니터에서 새 폴더를 만들게 되면 새(鳥) 이름의 폴더가 기본으로 생성됩니다. 무려 41개의 새 종류가 있다는군요. 압축프로그램인 ‘알집’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생겨진다니 이 시의 은유가 새삼 와닿습니다. 그러고 보면 컴퓨터에 저장된 수많은 폴더는 본래 새의 이름이었던 것이며, 그 안의 문자들은 모두 알처럼 시간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9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