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락』 / 정끝별 ( 1988년『문학사상』으로 등단) / 창비시선 295
꽃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한소끔의 밥꽃을
백기처럼 들었다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감상]
봄에게 있어 시간이란 어느 오전의 기다림이겠다 싶습니다. 꽃을 피운다는 건 시간의 도정에서 문득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쓸쓸하게 번져오는 존재감 같은 것. 꽃들은 봄볕에 일제히 피는 듯싶지만 제각각 나름의 사연과 나름의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를 버텨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봄날 지천의 꽃들은 단지 오늘이 아니라, 꽃을 경험하는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합니다.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리고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번식해가는 저 치열한 生에게 봄날은, 잠시 떠올려보는 ‘미련(未練)’같은 것입니다. 잊지 않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봄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