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저녁빛」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시와반시》2009년 봄호
바닷가 저녁빛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버드나무 꽃가루가 자꾸 날아와
다래끼를 나게 하는 바다
선창가 외진 술집
금간 담벼락 밑에 핀 질경이꽃처럼
먼지투성이의 삶을
눈빛으로나마 바다에 빠뜨리며 걷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수평선에 잔해를 이루며 노을은
시간의 땔감들을 한단씩 태우며 저문다
새살이 돋아나는 통증인가
부서진 초침과 분침들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나오는 별들로
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저 물속에서 피는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감상]
저물녘 서해바다를 오래도록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백사장 끝 담벼락, 가뭇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먹먹하게, 다만 눈동자를 멍들게 하는 저녁해를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이 시는 눈(目)이 겪는 고통, 씀벅 감았다 뜨는 빛의 여운을 간결한 필치로 물들입니다. 마치 서서히 어두워지는 페이드 아웃(fade out)처럼 영화적 이미지가 선명하다고 할까요.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그해 서해바다의 저녁놀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어떤 기대도 찾아오지 않던, 스물 몇 해 그 막막한 대천 앞바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내 안에서 멀어져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