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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이마 - 하정임

2009.12.18 17:36

윤성택 조회 수:1189 추천:127

  <겨울의 이마>/ 하정임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 《현대시》 2009년 12월호

  겨울의 이마

  겨울이 깊어가니 눈이 내렸고, 밤이 깊어가니 애인이 찾아왔고, 사랑이 깊어가니 이마가 따가웠다

  하루에 열다섯 번씩 심심해진 애인과 이마를 붙이고 잠이 들고, 우리는 차이도 없이 솜털 같은 입김을 나누고, 도망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엮었다 창밖에는 흰 눈이 쌓이는데 우리는 이웃도 기약도 없이 애인이 되었다

  아득하고 서러운 식물이 키를 높일 때 방 안에는 우리의 웃는 얼굴이 방생 되고, 푸른 곰인형에게도 심장이 생길 듯했다 라디오에서 시대의 가난을 이야기할 때 더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발목을 끊어 서로를 먹이고 배가 부르게 쌓인 흰 눈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행성이 태양에 가까워지자 행성의 기울어진 이마에서 미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우리는 발자국이 남은 눈 위로 서로의 독해진 눈빛을 자주 풀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곧 없는 발목으로 떠나지도 못하는 방에는 식물의 이마 같은 떡잎이 떨어졌다 봄이 오거나 여름이 오거나 할 것이었다 발목도 눈도 없이 뜨거운 이마도 버린 채 우리는 그 방에 갇혀 울었다

        
[감상]
눈 내리는 겨울, 가난한 연인의 집이 있습니다. 그 안 존재로서의 두 남녀가 교감되는 과정이 애잔하게 이어집니다. 아마도 애인은 푸른 턱을 가진 것 같군요. ‘사랑이 깊어가니 이마가 따가’운 건 면도를 해도 까칠한 턱 때문일 것입니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함께하는 이 연인은 내면의 합일을 통해 존재에 대한 성찰로 환기됩니다. ‘서로의 발목을 끊어 서로를 먹이’는 행위는 어쩌면 이러한 신체적 훼손을 통해 그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를 공유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식물의 잎이 피고 지고 봄이 오고 가을이 와도 두 남녀는 계속 애인으로 남게 될까요. 혹시 감정이 떠나고 있다면 그 방은 서로의 구속은 아닐까… ‘우리는 그 방에 갇혀 울었다’의 맺음에서 겨울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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