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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류근 (1992년 『문화일보』로 등단) / 《문학과지성》시인선 375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 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감상]
살아남기 위해 버린다는 걸 나무들에게서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진정한 생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여서 수많은 감정적인 것들로 엮여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기억 속에서 끈질기게 자의식을 자양분으로 살아남습니다. 詩, 실패한 사랑, 종교, 고통…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친구’의 등장은 자신을 자학하거나 도통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메시지를 접수할 수 있는 일종의 채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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