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주파수》/ 김태형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 《창비 시인선》327
당신이라는 이유
발목께 짐을 내려놓고 서 있을 때가 있다
집에 다 와서야 정거장에 놓고 온 것들이 생각난다
빈 저녁을 애써 끌고 오느라
등이 무거운 비가 내린다
아직 내리지 못한 생각만 지나갈 때가 있다
다 늦은 밤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창문 가까이 빗소리를 듣는다
누가 이렇게 헤어질 줄을 모르고
며칠 째 머뭇거리고만 있는지
대체 무슨 얘길 나누는지 멀리 귀를 대어 보지만
마치 내 얘기를 들으려는 것처럼
오히려 가만히 내게로 귀를 대고 있는 빗소리
발끝까지 멀리서 돌아온
따뜻한 체온처럼 숨결처럼
하나뿐인 심장이 두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
숨 가쁘게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하던 그 순간처럼
[감상]
버스나 지하철에 무엇을 놓고 내렸다거나, 무언가에 골몰하는 바람에 내려야할 역에서 못 내린 경험.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생각은 여전히 순환버스처럼 과거로만 지나치고, 밤은 잠보다 독해 자꾸만 뒤척이게 합니다. 이 시는 이렇게 늦은 밤 빗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무심히 듣고 있는 것이라고 적습니다. 그만큼 ‘내 얘기’는 절실하며 뜨겁습니다. 인체의 혈관을 모두 합한 길이가 약 120,000Km로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하나 뿐인 심장에 두 사람의 피가 흐를 수 있다면 멀리서 돌아온 이 따스함의 순간이, 당신이라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