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캐비넷」/ 정병근/ 작가세계 2003년 가을호
골목의 캐비넷
화분들 옆 동양강철 캐비넷 씨
낡은 외투가 닳아지고 있네
내부로 가는 암호를 잊어버린 캐비넷 씨
철사줄에 두 손 묶인 채
얻어맞아 녹슬고 있네
비닐봉지 몇 개
박스 몇 장 품속에 넣었을 뿐인데
담벼락에 서서 오래오래 벌을 서네
화분에 심어진 고추와 상추를 곁눈질하며
다만 허기를 달래는 캐비넷 씨
흰자위 많은 눈을 깜빡이며
대외비(對外秘)의 기억을 더듬는 캐비넷 씨
아랫도리에 녹물이 벌겋게 스며들도록
비바람 맞으며 서 있네
집도 절도 없이
햇빛을 다 견디고 있네
[감상]
버려지고 소외된 것들에게서 詩는 항상 사연을 묻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상상력의 힘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버려진 캐비닛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묵묵히 비를 맞는 낡은 외투의 사내로 재탄생됩니다. 캐비닛의 요소들인 '암호', '대외비' 등을 시적인 상황설정에 따라 요소요소 배치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햇볕을 견딘다는 것, 그 '견딤'을 발견할 수 있는 시선이 그 사내의 전생애를 기억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