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서정학 / 『시작』2003년 겨울호에서 발췌
텔레비전
초인종이 울리고, 문득
그녀가 돌아왔다 저녁을 차려준다
오똑한 콧날 약간의 금발
그녀는 샤워를 한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낸다 계란 프라이를 한다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진 밥을 꺼낸다
국을 데워 그릇에 담는다
창가에 노란색 방범등
숟가락을 꺼내 식탁에 놓는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의자에 앉는다
튼튼한 의자와 그녀의 넓은 이마
인형 같은 그녀는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감상]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통해 보여줍니다. 초반부의 현실인 듯한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텔레비전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가를 말해주는 듯 싶습니다. 2연의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끌어온 흐름과 구분, 구별시키는 결정적인 현실코드입니다. 책을 읽어야겠다, 시를 써야겠다 마음먹으면서도 드라마에 저녁 내내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로 그런 게으름이 나를 신파스럽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