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뒤의 사랑』/ 오인태 / 《뜨란》 2002
등뒤의 사랑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세울 수가 없었다
[감상]
감성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관념을 밀고 가는 힘 곁에 마음을 빗댈 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그 나무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그 나무를 통해 당신을 느낍니다. 세월은 항상 우리에게 어디론가 걷게 만듭니다. 떠날 수밖에 없는 건가 봅니다. 함께 갈 수 없다면 이별은 눈물 밖의 일입니다. 시인의 자서를 덧붙입니다.
사랑하는 일도, 사는 일도 도무지 쓸쓸하다 여겨져서 마음이 마치 적막강산에 홀로 선 나무 같아질 때, 혹은 모두가 잠든 새벽녘을 교교히 흐르는 달빛 같아질 때 시는 내게 찾아오곤 했다. …(중략)… 이제 다시는 내게 오지 마라. 죽든지 살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네가 채 사립문도 나서기 전에 내 등뒤를 서성이는 이 완강한 그림자는 또 무엇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쓸쓸해야 할까. 그래도 어쩌랴. 그래, 가지 마라 쓸쓸함아. 시야. 이젠 내 사랑도, 남은 내 생애도 아무런 대책 없이 버려 두지는 않겠다. 너무 오랫동안 죄를 지었다. 내게, 그리고 내 사랑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