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뿔》 / 이미자 (1996년《현대시》로 등단) / 《천년의시작》 (2007)
버스 정류장
손톱으로 누르면
무른 한낮이 복숭아처럼 으깨진다 나는
여전히 연애는 신파라고 생각하지만
떠나간 남자가 신문을 펼치면
전단지처럼 몰래 눈물을 끼워넣을 줄도 안다
버스는 늦게 온다 진부한
깨달음이 그러하듯
흙탕물이 얼룩진 사월의 평상에게
썩어가는 꽃들에게
안녕! 나는 꽃피는 폐허야
이제는 인사도 건넬 수 있는데
구월에 떠나간 남자가 커피를 쏟고
칠월에 떠나간 남자가 무릎을 닦아준다
꽃피는 시절은 누구나 눈물겹지만
마른 빗물 자국처럼 곧 희미해지지
운전기사는 검은 안경을 쓰고 페달을 밟는다
내가 모든 정류장에 설 줄 알았니?
우리들의 시들한 연애가 휘청거리는 동안
나는 괜한 허공에 삿대질을 해댄다
마침내 먼 곳으로, 아끼던 풍경들이
모두 달아날 때까지
[감상]
버스를 기다려본 사람은 압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때론 추억에 이정표를 세우고 제 스스로 간이역이 되고 있음을. 멍하니 버스가 와야 할 저편에 시선을 걸쳐두고 생각은 이미 마음 어딘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중요한 모티브로 쓰이고 있는 <연애>는 과거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연민만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기치 못하는 상황으로 이끄는 전환과 위트가 경쾌하게 배치되어, <내가 모든 정류장에 설 줄 알았니?>에서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트로트계의 여왕 이미자와 동명이신데, 찾아보니 그간 <이지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시인이시더군요. 여하간 순박하고 친근한 이름입니다만 시집의 자서를 보니 지금 슬로바키아 블라티슬라바에 가있고 실린 시들도 참 치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