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기원》 / 조연호 (1994년《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문예중앙》 (2007)
물 밑의 피아노
누나가 바늘에 꿴 실로 글자를 쓴다, 작은 집들이 산턱에서 사라진 후 케이블카가 그 위를 종일 왕복하고 있었다. 누나, 피아노들이 떠오르고 있어. 앞코가 찢어진 신발 속으로 물이 드나들고, 누나의 글씨쓰기는 앞과 뒤가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누나가 쓴 글자는 한없이 느려져 겨울이 되어서야 한 장의 편지가 될 것이다. 억울해 억울해 지덕노체 4H구락부 마크가 찍힌 무너진 집 벽을 끌어안고 청년이 울 때 그의 나이 많은 두 형제는 발톱을 깎고 있었다. 생애 이렇게 눈부신 날, 누구나 자기 눈을 찌른 첫 번째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누른 검은 건반을 누나의 흰 건반이 감쌀 때, 피아노의 다리들은 물 밖을 나오지 않는 것으로 여름과의 약속을 지켰다.
[감상]
마을은 수몰지구로 사라지고 그 자리 위로 관광지의 케이블카가 드나듭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것들, 그 부재의 감성이 잔잔하게 밀려옵니다. <누나>란 말, 사실 사내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익숙하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영화 <피아노>에서처럼 그 쓸쓸한 물속이 아련함과 어우러지면서 <한 장의 편지>로 떠오릅니다. 억울하다는 것, 모두들 떠나야한다는 것, 집도 전답도 낡은 피아노도 모두 물에 잠기는 풍경이 무심하게, 그러나 눈부시게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