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허공의 안쪽 - 정철훈

2007.05.30 17:54

윤성택 조회 수:1508 추천:148

<허공의 안쪽> / 정철훈 (1997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 《서정시학》 2006년 겨울호


        허공의 안쪽

        사십구제를 마치고 하룻밤 묵으러 들어온 산방(山房)
        파리 한 마리가 방안을 휘돌아치며 붕붕거린다

        천장이며 벽이며 창문에 몸을 찧기 여러 차례
        허공이 있었는지도 깜박했는데
        파리 한 마리가 허공에도 길이 있다며
        갈지자로 휘적거린다

        허공안에 또 한 겹의 허공이 있다는 듯
        머리가 깨져라고 부딪치는 날파리

        망자는 어디로 간 걸까
        화장터에서 곱게 빻아온 유골 단지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속에
        망자가 없는 건 분명한데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이 내 안에 가라앉고 있다

        나는 마당에 나가 달 구경을 하고
        날벌레들은 방안에 들어와 형광등 구경을 하고
        내가 망자에 대한 생각으로 골똘해 있을 때
        
        파리며 하루살이며 나방이며 질겁한 날벌레들은
        망자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영혼의 벽에
        쉴새없이 부딪치고 있다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의 안쪽
        붕붕과 휘적휘적 사이


[감상]
이 生에서 삶의 저편이 죽음이라면 어딘가 죽음과 삶의 경계가 존재할까,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시인은 그 경계를 <영혼의 벽>으로 통찰해냅니다. 날벌레들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불빛 아래가 사실은 죽음의 경계이듯, 망자 또한 그토록 집착했던 것들이 사실은 죽음의 경계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그래서 날벌레와 화자의 대별되는 상황 설정이 의미를 깊게 합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이라든지, 화자가 달 구경할 때<날벌레들은 방안에 들어와 형광등 구경>한다는 표현들이 그러합니다. 허공의 안쪽에는 이렇듯 산 자와 죽은 자가 겹쳐지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상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폐가 - 이동호 [1] 2006.06.16 1566 230
1010 틈 - 신용목 2005.08.02 1902 230
1009 해바라기 공장 - 이기인 [1] 2005.06.23 1715 230
1008 18세 - 박상수 2004.06.03 1590 230
1007 울고 있는 사내 - 장만호 2006.07.31 1879 229
1006 가문동 편지 - 정군칠 2006.02.02 1657 229
1005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 신지혜 [1] 2005.01.20 1393 229
1004 2005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8] 2005.01.03 2299 229
1003 등뒤의 사랑 - 오인태 2004.03.19 1573 229
1002 단체사진 - 이성목 2002.08.09 1482 229
1001 회전문 - 이수익 2006.12.11 1445 228
1000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2006.02.15 2024 228
999 낙엽 - 이성목 [2] 2005.11.10 2520 228
998 텔레비전 - 서정학 2003.12.30 1290 228
997 1984년 - 김소연 2002.03.20 1243 228
996 초원의 재봉사 - 변삼학 2006.05.16 1445 227
995 바람의 목회 - 천서봉 [4] 2005.12.01 1978 227
994 옥상 - 정병근 [3] 2005.11.03 1847 227
993 희망에 부딪혀 죽다 - 길상호 2004.06.04 1735 227
992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 김명인 2002.10.15 1359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