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6:53

윤성택 조회 수:1354 추천:145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 / 《시인의 눈》 2007


        녹색에 대한 집착

        이의동 광교신도시,
        미라가 된 수만 기의 볏짚 무덤 위로
        흰 뼈 드러낸 아파트들이 귀화식물처럼 자리 잡고 있다
        국도43호선 도로변 도랑을 따라 개구리밥이 자라고
        반쯤 뭉그러진 논둑에는
        각시붓꽃, 애기똥풀, 뱀딸기꽃, 조팝나무꽃들이
        낯선 불도저 발자국에 꽃누루미가 되어
        화석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철조망에 둘러싸여 섬이 되어 버린
        유토피아 농원의 오래된 느티나무 가지에는
        찢어진 검은 비닐조각들이
        바람에 날려 만장처럼 펄럭이고 있다
        마지막 남은 미나리밭을 포크레인이 메워버리자
        전봇대에 매달려 있던 전선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자연&아파트 현장분양사무실,
        현관 거울에 얼핏 비친 초록빛 코트가
        햇볕과 바람에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경비실로 가는 좁은 화단 사이로
        강제로 이주된 할미꽃들이
        생매장되어 가는 푸른 포자들을 위해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하고 있다        


[감상]
도시는 점점 자연 속으로 들어와 제 비대해진 흔적을 부려놓습니다. 신도시 개발이라는 말은 사실 자연에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침략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행되고 있는 무자비한 자연의 훼손은 개개의 식물에 대한 학살인 것이어서 <찢어진 검은 비닐조각들이/ 바람에 날려 만장처럼 펄럭이>는 것입니다. 이 시는 그런 현실을 직접적으로 구호화하지 않고 그 대상들에서 울려나오게끔 세심하게 묘사해냅니다. 이 시점에서 자연의 저항은 아마도 인공적인 <초록빛 코트>를 기어이 탈색시키고야 마는 <햇볕과 바람>의 분투일지 모릅니다. <자연&아파트>의 아이러니가 그러하듯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연을 거느리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되고 파괴 되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시인은 지나친 비판적 시각에 대한 우려까지 <녹색에 대한 집착>으로 껴안으며 그 들녘의 아픈 목소리들을 들려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010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2002.02.18 1204 186
1009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2002.02.19 1138 188
1008 귀향 - 박청호 2002.02.20 1187 195
1007 수도관은 한겨울에만 꽃을 피우고 - 심재상 2002.02.21 1133 215
1006 푸른 사막을 보고 오다 - 권현형 2002.02.22 1412 182
1005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2002.02.23 1601 181
1004 나무를 생각함 - 최갑수 2002.02.26 1295 177
1003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 김영남 2002.03.04 1196 200
1002 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 - 이정록 2002.03.05 1219 178
1001 버리고 돌아오다 - 김소연 2002.03.06 1174 184
1000 PC - 이원 2002.03.07 1220 198
999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 이선영 2002.03.11 1151 215
998 젊은 날의 겨울강 - 최동호 2002.03.12 1152 210
997 가시 - 남진우 [1] 2002.03.14 1327 217
996 바람불던 집 - 장승진 2002.03.15 1183 200
995 안개에 꽂은 플러그 - 이수명 2002.03.16 1118 178
994 신림동 마을버스 - 최승철 2002.03.18 1151 171
993 무덤 - 안명옥 2002.03.19 1145 205
992 1984년 - 김소연 2002.03.20 1243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