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몰락, 시정신의 부활』 / 21세기 전망 제5시집, 김소연 / 김영사
1984년
기름 얼룩에 절은 옷가지며 이불들 어머니는 개켰다 폈다만 하였
다 풍경이 일그러진 집안 내력을 장마 끝에다 널어 놓았다 양지에 앉
아서 동생은 젖어 못 쓰게 된 일기장을 태웠다 잘 타지 못하는 젖은
생각들이 매운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얀 안개를 내뿜으며 저편에서
소독차가 달려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가고 있었다 휘
어지고 모서리가 터진 장롱처럼 나는 골목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
다 소각되는 미래가 집집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곰팡이 호흡을 했다
아침도 어두웠다
조그만 비에도 우리는 어지러웠다
물의 발바닥이 밟고 다니는 낮은 위치를
더 낮게 낮추기도 했다
꿈들은 자꾸 누전되었다
고래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젖은 꿈을 꾸었다
물이 빠진 자국은 뚜렷한 선을 남겼고
우리는 해마다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도배지를 발랐다
더 이상은 젖을 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슨 힘일까,
벽지를 들고 곰팡이가 일어서고 일어나는 지칠 줄 모르는 그것은
[감상]
기억합니다. 1984년 엄청난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 물난리 때 종아리까지 차 오른 아스팔트 위 물결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검은 물들이 급하게 어디론가 흘러가는 새벽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군요. 오돌오돌 떨면서 몸을 옹송그렸던 그때. 이 시는 그 체험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곳곳에 비유들이 꿰맨 상처 아물자 실밥 뽑아내는 것처럼 아릿하고요. 잠시 1984년, 그 기억이 내게도 전송되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