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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 신지혜

2005.01.20 11:55

윤성택 조회 수:1393 추천:229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 신지혜/ 200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롱 아일랜드 해안에서

  잠언 같은 저녁놀이 피었다진다 꽃이파리처럼 내 사유 몇 잎이 뚝뚝, 떨어진다
바다가 쏘아올린 둥근 달,  그 질긴 달빛이  나를 포승 지어 우주 어디로 끌고 간
다 지금 이 밤을 통째로 압송중이다

  나는, 천천히 인적 없는 달빛 해안을 끼고 걷는다 내 속은 텅 비어있다 내가 유
리잔이다 노오란 달빛이 찰랑거린다 흰 파도와 다투어 잔을 부딪힌다 몇 천년을
두터이 껴입고 반가사유하는 희고 단단한 저 돌들처럼,  내 안에 시퍼런 불이 켜
진다 쓸쓸함의 미세한 알갱이들 텅텅 마알간 공명이 울린다

  잠시, 물거울에 날 비춰보고 돌아섰는데 금세 나를 잊어버린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 물음표같은 발자국들이 듬성듬성  모래해안을 끌고 바다로 들어간다  나는
허리 굽혀 심해를 가만 들여다본다 세상이 그 안에 들어있다  우리는, 마치 서로
가 배경이듯, 필연에 의해 마주친, 산란한 눈빛이다 서로가 그리워 흐려진다

  쓸쓸한 행성처럼,  내가 허공 중심에 걸린다  푸른 한숨을 뿜어낸다  예서제서,
숨은 존재들이 앞다퉈 사유를 켠다  막막한 우주의 관제탑에 오늘,  내가 비로소
행성의  이름으로 등록된다  나는 반짝반짝 쇠줄보다  더 강한 사유의 뿌리를 저
우주 물밑에 늘어뜨린다 가끔씩, 찌가 들썩거린다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


[감상]
세계에 대한 거시적 관점이 인상적입니다. 이 시의 탁월함은 파도가 부딪치는 형상이라든가, 그리고 둥글게 닳아버린 돌들, 그 안을 들여다보는 화자의 심리가 유려한 수사로 표현된 데 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 트인 상상력도 문장마다 탄력을 주고 있고요. 마치 여러 영상이 오버랩 되면서 펼쳐지는 파노라마 같다는 생각. 칡넝쿨처럼 엉킨 욕망을 차력사처럼 온몸에 휘감은 채, 고만고만한 세상살이 아옹다옹 살다가 문득. 이런 시가 뒤통수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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