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 아지매》 / 변삼학/ 문학의전당 (신간)
초원의 재봉사
말을 타고 달려 나간다
말발굽 가락 따라 박음질이 초원을 헤치며
어깨선 고지를 바늘땀 점점이 찍고 넘는다
소매의 등고선을 타고 한 굽이 돌아
허리곡선 아래 더 넓은 숲 속에 들면, 나무들
원피스 자락으로 훌쩍 자라난다
한 줄기 바늘바람 지나간 자리마다 깃 칼라의
꽃이 피며 가지마다 열매 주머니가 달린다
저르릉 흐르는 실개천 물소리에 솔기마다
길이 환히 열리고 다 자란 나무들
제각기 색과 이름을 달고 우거진다
숲의 바람소리 한 옥타브 높아져 가면
재봉사들의 입가에도 네 박자 바람이 분다
오락가락 외다리추로 박자를 맞추던 뻐꾸기
두 팔을 니은자로 편안히 놓일 즘이면 슬몃슬몃
재봉사들에게 침입하는 졸음의 장난에
바늘땀은 달아나는 실뱀처럼 간혹 휘어진다
누군가 따뜻한 사랑얘기 확 풀어놓으면,
실뱀은 놀라 굽은 오솔길로 달아난다
초원의 저녁이 산수유 빛으로 피어오르면
말갈기가 섬유의 보푸라기로
소복이 둥근 먼지 꽃으로 피어난다
재봉사의 발등에는 슬리퍼 자국, 소복소복
한 쌍의 반달로 부풀어 환하다
반달을 신고 귀가하는 발자국에 달빛이 고인다
[감상]
재봉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상상력이 따뜻한 시입니다. 시인은 밀폐된 채 원단 먼지 폴폴 날리는 좁은 작업장을 예리한 관찰과 육화된 경험으로 들여다봅니다. 재봉틀 구르는 소리는 말발굽 소리가 되고 색색 옷감들은 꽃으로 피어나기도 합니다. 졸리고 힘들 때 농담으로 풀어놓는 누군가의 <사랑얘기> 또한 졸음의 <뱀>을 쫓아내는 각성제 역할도 하겠고요. 이렇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문학을 통해 구현될 때 그 상상력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갑갑한 가슴을 시원하게 여는 소통으로 체험됩니다. 슬리퍼를 오래 신었다가 벗었을 때 발등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눌린 자국조차 이 시에서는 환한 <반달>의 모습으로 재탄생됩니다. 어쩌면 소외되고 억압받았을지도 모를 삶이 이처럼 아름다운 건, 시인의 진솔한 희망이 깊이 있는 안목으로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