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이수익/ 《시인시각》 2006년 겨울호
회전문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대형 빌딩은 수직의 화강암 비석처럼 깜깜하게
하늘에 떠 있다
낮에 삼켰던 사람들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생각과
말들, 일거수일투족의 그림자, 그들의 홍채와 지문까지
다시 기억을 재생하고 판독하고 복사하고 지우면서
대형 빌딩은 눈을 감고도 잠들지 않는다
회전문은 묶여 있어도, 그렇다고 쉬는 것도 아니다
[감상]
대형 빌딩의 육중하고 거대한 몸을 <향유고래>에 비유한 것이 인식의 전환점입니다. 이렇듯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그 대상의 소소한 것들도 새로운 의미로 부각됩니다. 대형 빌딩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업무들, 그 거대한 자본주의적 습성이 <유쾌하게 저의 포식>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밤이 되어도 팩스와 이메일에는 지구의 어딘가와 끊임없이 교신하며 정보가 쌓이고, 사람들보다 먼저 <기억을 재생하고 판독하고 복사하고 지우>기를 반복하겠지요. <미끄러운 시간>을 유유히 유영하며 이 거대한 대형 빌딩 <향유고래>는 내일로 내일로 쉬지 않고 저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