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폭우가 쏟아진다』 / 권영준 / 시작 시인선 17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한때 사랑이었던 그대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진첩만큼
낡아있는 그때의 기억들이
아직도 흑백필름에 담겨 소리 죽여 돌아가는 것은
지금도 널 사랑하기 때문일까
왜 그랬을까
그 후의 그리움을 어쩌려고 그렇게 조급했을까
어쩌면 그대도 날 사랑했으리란 믿음이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어,
우리 돌아서던 날 쏟아 붓던 비는
지금도 너를 데리고 내게로 내리고
작은 손 언제라도 들어와 쉬던
내 주머니 안은 아직도 빈방으로 남아 있어
너는, 타인의 방안에서도 따뜻함을 느끼는가
낯선 거리를 걸을 때에도
문득문득 너의 실루엣이 필름에 담기는 건
아직도 널 미워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낡은 사진첩이 더 낡을 때쯤
너와의 사랑도 그만큼 더 낡아질 수 있을까
있을까
[감상]
옛날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선율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아직도 널 미워하기 때문'의 부분에 이르러, 아직도 잊지 못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는, 타인의 방안에서도 따뜻함을 느끼는가'에서 울컥, 감정이 현실의 문턱을 넘는 소리가 납니다. 이런 사랑, 이런 감정 누구나 다 한 번쯤 겪어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진첩이 낡아가고 그대의 얼굴이, 그대의 목소리가 잊혀지더라도 결국에는 한 점 이미지로 남아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것. 그대는 알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