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민달팽이들 - 문성해

2007.03.23 17:49

윤성택 조회 수:1329 추천:154

<민달팽이들> / 문성해/ 《열린시학》 2007년 봄호


        민달팽이들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을 해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감상]
껍데기가 없는 민달팽이는 낮에는 돌 밑이나 흙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옵니다. 이 시는 이런 달팽이의 생태를 통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근대의 목욕 개념은 살을 불려 죽은 표피를 벗겨내는 이태리타월 식의 위생이지만, 요즘은 지하 사우나가 찜질방으로 변모해 목욕개념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포괄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쉬고 잠자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 사우나로 몰려듭니다. 이 시는 이런 지하 사우나를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으로 표현해 생경하고 낯선 공간으로 변모시킵니다. 여기에 이 시의 매력이 발산됩니다. 사실 사우나에서는 누구든 벗어야 합니다. 정치인이건 문신한 조폭이건, 군인이건 아줌마건 처녀건 모두 남탕 여탕에서 맨몸뚱아리로 마주합니다. 이런 풍경이야말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맨몸들을 훑고 나온 증기는 이제 환풍기로 밀려나와 한겨울에도 <라일락>을 꽃피웁니다. 꽃도 이렇게 징글맞은 사람들에 취해 제 향기로 깨어나는데, 그 앞에서 사소한 집착이 어디 떠올려지겠습니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91 캣츠 - 전기철 [1] 2004.01.19 1094 182
990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989 허불허불한 - 김언희 2002.02.15 1096 177
988 징글벨 징글벨, 겨울비는 내리고 - 최금진 2002.12.16 1096 172
987 그녀의 염전 - 김선우 2003.05.02 1096 173
986 봄 꽃나무 아래 서면 - 권현형 2003.05.09 1097 178
985 형상기억합금 - 이혜진 2002.07.16 1098 202
984 미탄에서 영월사이 - 박세현 2001.11.08 1099 188
983 물고기 여자와의 사랑1 - 김왕노 2003.01.13 1099 193
982 11월의 밤 - 서지월 2002.12.01 1101 186
981 도망자 - 이현승 2007.10.17 1101 114
980 홍예 - 위선환 2004.01.12 1102 223
979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수련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2002.01.30 1103 199
978 고려장 2 - 정병근 2004.12.23 1104 197
977 달빛 세탁소 - 최을원 2002.11.25 1105 194
976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2004.11.08 1105 170
975 강 건너 불빛 - 이덕규 2009.03.02 1107 101
974 도시생활 - 설동원 [1] 2003.12.18 1108 182
973 겨울잠행 - 손순미 2003.02.07 1110 178
972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 권영준 2003.06.27 1110 168